미야자키 하야오는 끊임없이 대중에게 살아가는 방법에 관한 질문을 던진 감독이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계보를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 감독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를 보자. 욕망으로 점철된 인간이 무의미한 전쟁을 통해 자연적 삶을 파괴하려 든다. 이에 주인공인 '나우시카'는 그 모든 행위가 그저 자기 파괴적일 뿐이며, 진정 해야 할 일은 자연과 함께하는 것이라 말한다. 돌이켜보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작품 속에서 항상 숲, 바다, 늪, 호수, 그에 기생해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를 공들여 표현했으며 그들을 지켜야 한다고 설파해 왔다. 그런데 이 생태계에는 인간 역시 포함된다. 타 지구 구성원들과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지만, 엄연히 인간 또한 지구를 구성하는 일원인 셈이다. 그렇기에 감독은 영화에서 우리 인간에게도 소중함을 전달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다소 도발적인 제목에, 요시노 겐자부로의 책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원작으로 삼고 있으나 사실상 원작과의 내용 공통점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오히려 이 영화는 원작의 의도대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여 다정한 설교를 하려는 듯 보인다. 약간의 문제가 있다면, 이 영화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특성을 잘 알지 못하면 반쪽짜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는 지점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전쟁 이후 새로 태어난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살아가는 방식에 던지는 질문이다. 스튜디오 지브리 및 그 전신을 포함, 전쟁을 묘사한 영화로는 크게 <반딧불이의 묘>, <바람이 분다>, <붉은 돼지>가 있다. 이중 <반딧불이의 묘>는 타카하타 이사오가 감독을 맡았으며, 전쟁은 매우 처참하고 끔찍한 행위로 표현된다. 반면 <바람이 분다>와 <붉은 돼지>에서는, 최소한 전쟁에 쓰이는 전투기(비행기)에 대한 로망이나 멋을 가지고 있다는 게 은근히 느껴질 정도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반전주의를 표방하는 좌파 예술가로 대표되지만, 한편 <붉은 돼지>를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을 정도로 전투기를 좋아하는 면모가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제 모순적 성향을 모두 영화로 풀어내길 선택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 영화에서 전쟁이란 부정적 면모, 인정하고 극복해 내야 할 과거의 것으로 그려진다.
전쟁피해자로서 가족을 잃은 주인공 마히토는, 종전으로 향해가는 길에 놓인 새어머니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극구 부인한다. 그의 기억은 공습 당시 자신의 가족이 죽었던 순간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던져지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달랐다. 마히토는 결국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기로 한다. 여기서 벗어나기로 한 것은 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현재를 가꿀 거름으로 삼겠다는 의미에 가깝다.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 속의 반전주의는 때로 일본의 자기 위로로 치부되곤 하나, 이 감독은 항상 영화의 등장인물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해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편이 좋다. 화평할 수 없기 때문에 전쟁이 나쁜 것이 아니라, 종국에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구분할 수 없게 될 정도로 서로를 좀먹기 때문에 나쁜 것이다. 반면, 영화 속 세계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전쟁과 반대되는 자연 생태계의 근간을 남겨둔다. 살아남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먹거나 잡아먹는 행위이다. 이는 감독의 여러 작품에서 드러난 주제이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직접적인 대사를 통해 말한다. ‘교활함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생태계의 순환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전쟁은 그 자연스러움을 파괴하고 세계를 지옥처럼 만들어버린다. 그렇기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묻는다. 인간, 특히 주인공 마히토로 대표되는 우리들 인간은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대답은 어렵지 않다. 악의와 선의는 명확히 구분해 낼 수 없고, 한 사람이 가진 악의와 선의도 다양하므로, 완벽히 분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두 가지의 혼돈을 잘 다스리기 위해 비슷한 처지의 친구를 만들면 되는 일이다. 전쟁으로 시작되어, 마히토가 겪은 모든 불합리함은 결국 같은 인간 혹은 생명과 어우러지며 해소된다. 만들어진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생명과 관계하며 살아가는 것, 그 사이에서 올바름을 찾는 것―즉, 전쟁과 같은 명확한 악의를 멀리하는 것ㅡ이야말로 살아가야 할 방식이라는 소리다.
작품이 건네고 싶은 메시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게 전부였다. 돌이켜보면 매우 간단한 데다 항상 미야자키 하야오가 표현하고 싶었던 주제다. 이번 영화에서는 더 확실하게, 직접적으로 언어를 빌려 표현했을 뿐이다. 알게 되면 조금 김샐 수도 있겠다. 그러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성향, 그의 필모그래피 속 표현방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정확하게 전달되었을지가 의문이다. 화면 구성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 특성상, 영상을 뜯어보고 대사까지 체크하기엔 시간이 매우 부족하게 느껴진다.
또한 이 영화에는 스튜디오 지브리, 그리고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전적 특성도 포함되어 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는 질문은 단순히 청소년들에게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자신과 스튜디오 내부 사람들에게 함께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일본 장편 애니메이션 계는 오래도록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 및 노화 이후 일명 후계자를 찾기 위한 미증유의 여정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자주 거론되는 신카이 마코토, 호소다 마모루 등, 누군가가 거장이라 불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뒤를 이어 흥행과 동시에 독특한 작품세계를 계속해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겠다.
한 사람의 영향력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제작사인 스튜디오 지브리는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영화는 작중 인물의 입을 빌려, ‘이 세계는 오래가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스튜디오 지브리 설립 및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준 타카하시 이사오가 향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5년째다. 스튜디오 지브리는 제작팀이 해산되고, 타 기업으로의 매각 절차를 밟고 있다. 자신만의 세계를 발견해 가꾸어가고 있었으나 세대 변혁과 세계 변화 속에서 스튜디오 지브리의 가치 역시 영원할 수 없는 법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을 둘러싼 인간관계와 자회사의 상황을 전부 이 작품에 함께 녹여낸 것 같다. 결국 그의 자리를 이어 줄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이는 감독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같기도 하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오래도록 자신의 가치관인 '반전주의', '에코이즘'을 표방하며 작품을 통해 이를 전파했다. 이를 마주하는 대중이 동조해 주기를 바랐지 않았을까. 그러나 감독이 보아온 사람들은 고개를 돌리면 금방 잊어버리고, 그 속의 메시지를 기억하지 못했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작품은 ‘어차피 잊어버릴 것’이라고 말한다. 거의 확신에 가까운 투다. 그러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처럼 돌아서서 바로 잊는 일은 없다. 주인공인 마히토가 모험의 대단원에서 무언가를 얻은 것처럼, 관객도 분명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영화는 극장에 걸려 상영된다.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과 질문을 전한다. 그리고 마침내 제 역할을 마쳤다고 여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를 결심하고 만든 작품인 만큼, 더 확실하고 노골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줏대 있게 이어간다. 전쟁을 경험하고, 개발로 인한 파괴를 겪은 노인의 충고가 아름다운 시청각을 입은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자연주의적 상징을 모성, 특히 생명의 탄생 과정과 엮는 방식도 여전하다. 우스꽝스럽고 무식하기까지 한 자연의 파괴자이자 개발자―에코페미니즘적 관점에서의 가부장도 여전하다. 이 뻔하고 당연한 감독의 방식을 좋아한다면 반가운 격언이겠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두리뭉실한 잔소리로 들릴 법하다.
그럼에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에 온점을 찍었음에도 나아감을 그만두지 못하고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하고자 결심한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떤 심정일까. 그에게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 이상으로 뭐가 남아 있는 걸까. 자전적이고, 어쩌면 당연하고, 지루하며 고루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이 작품은 개봉된 순간부터 누군가 던져주어야 할 질문을 충실하게 번복하고 있다. 영화관까지 발걸음 하여 이 이야기를 보고 들을 사람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그 답은 이미 영화 속에 제시되어 있다. 답을 보면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파괴를 멈추고 상생을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수십 년간 미야자키 하야오가 우리에게 보여준 한 가지 길이었다는 사실을.
'양상추' 카테고리의 다른 글
<TAR> 리뷰 (0) | 2023.03.11 |
---|---|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 리뷰 (0) | 2021.08.30 |
<썬더 포스> 리뷰 (0) | 2021.04.16 |
<소울> 리뷰 (0) | 2021.02.02 |
<봄의 저주> 리뷰 (0) | 2020.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