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리뷰

2023. 10. 27.

 

 

 미야자키 하야오는 끊임없이 대중에게 살아가는 방법에 관한 질문을 던진 감독이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계보를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 감독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를 보자. 욕망으로 점철된 인간이 무의미한 전쟁을 통해 자연적 삶을 파괴하려 든다. 이에 주인공인 '나우시카'는 그 모든 행위가 그저 자기 파괴적일 뿐이며, 진정 해야 할 일은 자연과 함께하는 것이라 말한다. 돌이켜보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작품 속에서 항상 숲, 바다, 늪, 호수, 그에 기생해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를 공들여 표현했으며 그들을 지켜야 한다고 설파해 왔다. 그런데 이 생태계에는 인간 역시 포함된다. 타 지구 구성원들과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지만, 엄연히 인간 또한 지구를 구성하는 일원인 셈이다. 그렇기에 감독은 영화에서 우리 인간에게도 소중함을 전달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다소 도발적인 제목에, 요시노 겐자부로의 책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원작으로 삼고 있으나 사실상 원작과의 내용 공통점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오히려 이 영화는 원작의 의도대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여 다정한 설교를 하려는 듯 보인다. 약간의 문제가 있다면, 이 영화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특성을 잘 알지 못하면 반쪽짜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는 지점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전쟁 이후 새로 태어난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살아가는 방식에 던지는 질문이다. 스튜디오 지브리 및 그 전신을 포함, 전쟁을 묘사한 영화로는 크게 <반딧불이의 묘>, <바람이 분다>, <붉은 돼지>가 있다. 이중 <반딧불이의 묘>는 타카하타 이사오가 감독을 맡았으며, 전쟁은 매우 처참하고 끔찍한 행위로 표현된다. 반면 <바람이 분다>와 <붉은 돼지>에서는, 최소한 전쟁에 쓰이는 전투기(비행기)에 대한 로망이나 멋을 가지고 있다는 게 은근히 느껴질 정도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반전주의를 표방하는 좌파 예술가로 대표되지만, 한편 <붉은 돼지>를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을 정도로 전투기를 좋아하는 면모가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제 모순적 성향을 모두 영화로 풀어내길 선택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 영화에서 전쟁이란 부정적 면모, 인정하고 극복해 내야 할 과거의 것으로 그려진다.

 

전쟁피해자로서 가족을 잃은 주인공 마히토는, 종전으로 향해가는 길에 놓인 새어머니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극구 부인한다. 그의 기억은 공습 당시 자신의 가족이 죽었던 순간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던져지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달랐다. 마히토는 결국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기로 한다. 여기서 벗어나기로 한 것은 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현재를 가꿀 거름으로 삼겠다는 의미에 가깝다.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 속의 반전주의는 때로 일본의 자기 위로로 치부되곤 하나, 이 감독은 항상 영화의 등장인물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해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편이 좋다. 화평할 수 없기 때문에 전쟁이 나쁜 것이 아니라, 종국에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구분할 수 없게 될 정도로 서로를 좀먹기 때문에 나쁜 것이다. 반면, 영화 속 세계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전쟁과 반대되는 자연 생태계의 근간을 남겨둔다. 살아남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먹거나 잡아먹는 행위이다. 이는 감독의 여러 작품에서 드러난 주제이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직접적인 대사를 통해 말한다. ‘교활함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생태계의 순환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전쟁은 그 자연스러움을 파괴하고 세계를 지옥처럼 만들어버린다. 그렇기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묻는다. 인간, 특히 주인공 마히토로 대표되는 우리들 인간은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대답은 어렵지 않다. 악의와 선의는 명확히 구분해 낼 수 없고, 한 사람이 가진 악의와 선의도 다양하므로, 완벽히 분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두 가지의 혼돈을 잘 다스리기 위해 비슷한 처지의 친구를 만들면 되는 일이다. 전쟁으로 시작되어, 마히토가 겪은 모든 불합리함은 결국 같은 인간 혹은 생명과 어우러지며 해소된다. 만들어진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생명과 관계하며 살아가는 것, 그 사이에서 올바름을 찾는 것―즉, 전쟁과 같은 명확한 악의를 멀리하는 것ㅡ이야말로 살아가야 할 방식이라는 소리다.

 

작품이 건네고 싶은 메시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게 전부였다. 돌이켜보면 매우 간단한 데다 항상 미야자키 하야오가 표현하고 싶었던 주제다. 이번 영화에서는 더 확실하게, 직접적으로 언어를 빌려 표현했을 뿐이다. 알게 되면 조금 김샐 수도 있겠다. 그러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성향, 그의 필모그래피 속 표현방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정확하게 전달되었을지가 의문이다. 화면 구성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 특성상, 영상을 뜯어보고 대사까지 체크하기엔 시간이 매우 부족하게 느껴진다.

 

 

 

 또한 이 영화에는 스튜디오 지브리, 그리고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전적 특성도 포함되어 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는 질문은 단순히 청소년들에게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자신과 스튜디오 내부 사람들에게 함께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일본 장편 애니메이션 계는 오래도록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 및 노화 이후 일명 후계자를 찾기 위한 미증유의 여정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자주 거론되는 신카이 마코토, 호소다 마모루 등, 누군가가 거장이라 불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뒤를 이어 흥행과 동시에 독특한 작품세계를 계속해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겠다.

 

 한 사람의 영향력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제작사인 스튜디오 지브리는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영화는 작중 인물의 입을 빌려, ‘이 세계는 오래가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스튜디오 지브리 설립 및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준 타카하시 이사오가 향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5년째다. 스튜디오 지브리는 제작팀이 해산되고, 타 기업으로의 매각 절차를 밟고 있다. 자신만의 세계를 발견해 가꾸어가고 있었으나 세대 변혁과 세계 변화 속에서 스튜디오 지브리의 가치 역시 영원할 수 없는 법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을 둘러싼 인간관계와 자회사의 상황을 전부 이 작품에 함께 녹여낸 것 같다. 결국 그의 자리를 이어 줄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이는 감독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같기도 하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오래도록 자신의 가치관인 '반전주의', '에코이즘'을 표방하며 작품을 통해 이를 전파했다. 이를 마주하는 대중이 동조해 주기를 바랐지 않았을까. 그러나 감독이 보아온 사람들은 고개를 돌리면 금방 잊어버리고, 그 속의 메시지를 기억하지 못했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작품은 ‘어차피 잊어버릴 것’이라고 말한다. 거의 확신에 가까운 투다. 그러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처럼 돌아서서 바로 잊는 일은 없다. 주인공인 마히토가 모험의 대단원에서 무언가를 얻은 것처럼, 관객도 분명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영화는 극장에 걸려 상영된다.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과 질문을 전한다. 그리고 마침내 제 역할을 마쳤다고 여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를 결심하고 만든 작품인 만큼, 더 확실하고 노골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줏대 있게 이어간다. 전쟁을 경험하고, 개발로 인한 파괴를 겪은 노인의 충고가 아름다운 시청각을 입은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자연주의적 상징을 모성, 특히 생명의 탄생 과정과 엮는 방식도 여전하다. 우스꽝스럽고 무식하기까지 한 자연의 파괴자이자 개발자―에코페미니즘적 관점에서의 가부장도 여전하다. 이 뻔하고 당연한 감독의 방식을 좋아한다면 반가운 격언이겠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두리뭉실한 잔소리로 들릴 법하다.

 

 그럼에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에 온점을 찍었음에도 나아감을 그만두지 못하고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하고자 결심한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떤 심정일까. 그에게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 이상으로 뭐가 남아 있는 걸까. 자전적이고, 어쩌면 당연하고, 지루하며 고루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이 작품은 개봉된 순간부터 누군가 던져주어야 할 질문을 충실하게 번복하고 있다. 영화관까지 발걸음 하여 이 이야기를 보고 들을 사람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그 답은 이미 영화 속에 제시되어 있다. 답을 보면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파괴를 멈추고 상생을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수십 년간 미야자키 하야오가 우리에게 보여준 한 가지 길이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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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추

<TAR> 리뷰

2023. 3. 11.

 

 

 2020년 전후는 사회·문화적으로 격동의 변화가 있었던 시기이다. 특히 코로나 19는 우리의 삶을 180도로 바꿔놓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접촉을 극도로 경계해야 하는 전염병의 특성상, 공연 업계는 막대한 손실을 입어야 했고, 오랜 침체 또한 결국 질병의 종식이 아닌 만연화를 통해 종지부를 찍었다. 무대에 설 수 없어도 예술활동은 생계이자 삶이기에, 많은 음악가는 유튜브나 SNS를 통해 대중에게 열린 음악회를 제공하고자 부단히 노력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공연문화가 어느 정도 정상궤도에 올라온 지금은 어떨까. 티켓파워를 통한 수익이 중심인 이상, 대부분의 공연은 다시 오프라인 형태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네트워크 공간을 통한 사이버 공연 문화가 사장되지도 않았다. 공유를 통해, 쉬운 접근을 통해 공연―특히 서양 클래식 음악 공연을 친근하게 제공하려는 노력 또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이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 및 생산하는 것은 소위 국내에서 MZ세대라고 불리는, 젊은 예술가들이다.

 한편, 2010년대 중반부터 일어난 사회적 현상 중 하나인 '미투 현상' 역시 사회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현재까지도 고발과 폭로를 통한 권력형 성범죄가 낱낱이 밝혀지고 있다. 공연계는 이 사회 현상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공연계 특성상 지도자와 그의 인맥이 생계와 직업활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에, 이전까지만 해도 범죄 사실이 공개적으로 밝혀지지 않거나 관계자들에 의해 깊이 은폐되어 왔기 때문이다. 국외를 막론하고 수많은 교수, 연주자, 혹은 예술가들의 치부가 밝혀지며 사회가 충격에 술렁였던 것이 그리 멀지 않은 일이었다. 심지어 지금도 크고 작은 성범죄 고발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상기한 사회적 변화는 단연코 순수예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아도 좋겠다. 긴 역사와 암묵적 규칙이 존재하고, 생존을 위해 커넥션이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특정하여 말하자면, 서양 클래식 음악계야말로 코로나 19로 인한 공연 침체와 내부 고발을 통한 도덕적 질문을 피해 갈 수 없는 가장 큰 목표물이라고 볼 수 있다. <TAR 타르>는 가상으로 꾸며진 베를린 필하모닉의 여성 지휘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 몰락해 가는지를 158분간 가감 없이 드러내는 형태의 영화다. <다음영화>의 시놉시스 내용 그대로, “무대를 장악하는 마에스트로, 욕망을 불태우는 괴물, 베를린 필하모닉 최초의 여성 지휘자 리디아 타르”가 정점에 섰을 때를 시작으로 한다. 영화 속에서 위대한 인물이자 이상을 좇는 예술가, 혹은 협회의 설립자, 동성 부부의 파트너로서 리디아 타르는 자신의 욕망을 뒤쫓아 서서히 무너져간다. 선대의 음악가들을 따라 진정한 음악과 그것의 철학적 의미를 고찰하지만, 음악에게 바치는 순수한 마음은 그의 독단적인 선택과 순간의 충동으로 더럽혀지고 만다. 결국 주류 사회에서 추방되고 변방으로 여겨지는 필리핀에 도달해서야, 자신의 민낯을 발견하고 겸허한 초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주인공인 리디아 타르는 복합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나 만약 영화감독이 '여성이자 레즈비언인 지휘자'를 통해 영화적 메시지의 전복을 꾀한 것이라면, 개인적으로는 무용한 일이었다 주장하고 싶다. 타르는 인터뷰에서 여러 여성 지휘자들의 이름을 거론하고, 여성 음악가의 후원을 통해 자기 자신을 여성적 계보를 이어갈 음악가처럼 표방한다. 그러나 음악가이자 가족으로서 타르가 선택한 방식은 명백히 가부장적이다. 이는 자신을 '아빠'라고 소개한 부분,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아카데미의 존재가 고루하다고 지적하는 부분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지휘자는 모든 악기를 아우르고 그것을 통솔한다는 지점에서 지배적인 역할, 즉 남성성의 젠더를 입고 있었다. 유명한 여성 지휘자, 특히 객원이 아닌 고정 지휘자의 출현이 현대까지도 드문 일로 여겨지는 것처럼, 음악사 속에서 남성적 젠더의 역할은 여성 음악가에게 쉽사리 허용된 적이 없다. 여성 음악가들은 극도의 제한을 타파하기 위해 두 가지 전략을 사용하였다; 하나는 강력한 여성성을 표방하여 '심벌'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남성성을 표방하여 그들과 '동류'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타르가 선택한 방식은 명백히 남성주의적 역할을 입고 스스로가 '남성'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의문인 부분은 여기서부터다. 타르는 이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가지거나 불만을 토로한 적이 없다. 오히려 젠더나 성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여성 속의 남성'을 언급하며 미러링을 시도한다.

 만일 현실 속 서양 음악계가 실제로 여성 주도적이었다면, 혹은 영화 내용과 같이 그 경계가 모호해졌다면 이는 효과적인 전복의 의도였을 수 있다. 영화배우의 대사가 진지한 고찰과 메타인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3년 현재에도 서양 클래식 음악계의 주축은 남성 음악가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젠더음악학이 활발해진 지금까지도 업계 내부의 실질적 성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결부시키지 않을 수 없겠다. 권력과 지위를 가진 다수의 위인은 현재까지도 남성 음악가이며, 대부분의 성범죄 또한 권위적 남성 음악가에 의해 이루어졌다. 타르는 여성의 날 날짜조차 알지 못하며, 그저 여성 음악가로 구성된 아카데미를 설립했을 뿐인 인물로, 작품 내부에서 보이는 행위와 방식은 사실상 가부장적 남성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남성적 젠더를 입은 여성 음악가의 경솔한 행동과 범죄, 그리고 몰락과 작금의 현실을 함께 보면 마이너리티를 통한 메시지 전달이 그다지 큰 의미를 지닐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똑같은 행위를 남성 음악가로 재현시켰다면 더 최악이었겠다. 영화가 아닌 그저 한 편의 다큐멘터리에 불과했을 테니까. 

 

 그렇다면 주인공의 메이저리티는 어떠한가? 사실 타르는 서양 음악계에서 이례적으로 '여성'이며 '레즈비언'인 것을 제외하면 삶 대부분이 전형적인 유럽 예술가의 형태로 구성된 인물이다. 독일, 미국과 같은 서양 음악의 메카를 경유하며 음악 활동을 이어온 한편, 학위를 위해 소수민족의 민요를 채집한다. 또한 작중 꾸준히 LP판을 통한 녹음을 선호하고, 유튜브나 SNS 등의 매체를 꺼려하는 행태는 아날로그를 선호하는 기성세대 예술인으로서의 특성을 견고히 한다. 코로나 19로 인해 달라진 공연계의 양상 속에서도 그는 과거의 방식을 고집하며, 거장의 예술 속에 갇혀있다. 말러를 존경하는 타르와 엘가로 대표되는 올가의 차이는 특히 이 부분에서 두드러진다. (에드워드 엘가 또한 신세대의 작곡가는 아니지만 말이다) <타르> 속 많은 젊은 예술가가 그들의 행동, 혹은 가치관을 통해 주인공과의 대립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이해할 수 없는 타자적 시선에서 다루어진다. 시시각각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영상을 찍고, 자유롭게, 혹은 방종한 젊은이들은 영화 내적으로 '못마땅한' 존재로 재생성됨과 동시에 외적으로 중립을 무너뜨린다. 기존 서양 클래식 음악계 역시 신세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편인데, 이 영화에서는 해당 현실을 답습할 뿐 아니라 예술가를 파멸하게 하는 장치로써 다소 이해심 없이 사용된 바가 있다.

 <타르>는 부패한 권력자의 몰락을 다큐멘터리적인 시선으로 담은 것이 맞을까. 이 영화 속에서 다소 경솔하게 다루어진 것은 젠더적인 측면과 코로나 19로 인한 젊은 세대 음악가의 부상뿐만이 아니라고 본다. 타르의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영화 말미 필리핀에 대한 묘사와 그곳에서의 인물상이야말로 작품의 객관성을 떨어트리고 엘리트 예술인 이외의 존재 타자화에 앞장선다. 타르가 성매매 업소에 들어 아이를 보고 나서야 자신을 궁극적으로 깨닫고 역겨움을 느끼는 장면은 노골적임과 동시에 의문을 갖게 만든다. 클래식 음악 후진국이라 여겨지는 남아시아로의 이직을 통해 몰락과 재기를 그려내는 것은 다분히 무지한 메이저리티의 상상력이 낳은 결과물일 것이다.

 

 긴 러닝타임 내내 케이트 블란쳇은 놀라울 정도로 영화를 이끌어간다. 영어와 독일어를 섞어가며 권위주의적인 지휘자를 연기하는 능력은 이 영화의 가장 멋진 점이자 대단한 장점이다. 그러나 반대로 말해, 이 영화에서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배우의 카리스마를 제외했을 때를 가정한다면 그다지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실제 클래식 음악계가 여전히 안고 있는 성차별과 착취 문제에 접근하였으나, 전복을 통해 유의미한 담론을 형성할 수는 없다. 위에서 말했듯이 여전히 남성 권위자 중심적인 서양 음악계에서 소수자인 여성이 미러링으로 조명받기에는 시기상조다. 중립적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취하고 이 태도를 견지하고자 했다면 작품 속 마이너리티로 대표되는 타자의 묘사를 더 신중히 해야 했다. 다른 요소를 모두 제외하고 오직 음악적 메시지를 통해 <타르>를 판단하기도 어렵다―이제 예술과 예술가에게는 순수한 예술성뿐 아니라, 도덕윤리가 마땅히 요구되기 때문이다. 음악가의 혐오와 음악의 아름다움을 분리하고자 하는 작중 타르의 태도는, 문화를 소비하고 연구하는 입장에서 누구도 올바른 답을 내릴 수 없는 가치이기도 하다. 감상 끝에 이 영화는 반여성주의적이지도, 지극히 순수예술적이지도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모든 메시지와 소수성을 애매하고 얕게 사용한 결과, 감독의 의도는 파악했으나 그것을 관철하기에 뒷받침이 부족한 영화가 된 것 같다. 영화 초반에 음악적으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기는 하나, 그것은 순수 음악에 관한 관철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타르가 맞이하게 될 몰락의 미래를 극적으로 비추는 도구적 역할에 불과하다 하겠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권력자에게서 일어나는 학대와 착취, '갑질'은 만연히 존재하며 업계를 발전시키고 올바르게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사항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양 음악계에서는 아직 여성이 몰락할 자리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2023년 현재까지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는 남성이며, 1882년 설립 이후 여성 악장이 임명된 것은 2023년 2월 7일의 일이다. 영화 속 대사를 인용하고자 한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영화 <타르>는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 같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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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추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 리뷰

2021. 8. 30.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방영을 시작한 지는 26년, <에반게리온 신 극장판> 시리즈가 시작된지는 1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에반게리온 Q>의 후속으로 끝맺음이 나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9년이다. 어린 나이에 작품을 보기 시작한 사람이 어엿한 사회인이 될 정도의 기간인 셈이다. 그렇게 한 인간이 성장하는 동안, 삶을 구성하는 많은 것들은 바뀌고 흩어져 과거가 된다.

세기말에 등장했던 작품이 퇴장하는 방식은 우리가 나이 들어가며 기억을 추억으로 바꾸는 것과 별반 다름이 없어 보인다. 포스터에서 고하듯이, 에반게리온은 바뀌어가는 인간의 과거를 보내는 장대한 이별식으로 끝을 맺기 때문이다.

 

 이전까지의 신극장판의 주된 비판점은 관객을 이해시키지 않는 무논리성이었다. 꾸준하게 비판을 받으면 고려할 법도 한데,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 (이하 에반게리온 다카포)는 과감하게 앞으로의 설명을 모두 포기해버린다. 관객에게 이야기의 전개를 납득시키는 대신, 이야기의 결말로 이끌어가기를 선택한 것이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어떤 식으로 세계가 변화했는지, 변화 지점의 주요 원인이 무엇인지는 그저 두리뭉실한 언어로 지정되었을 뿐 누구도 자세히 말하려 하지 않는다. 상기한 점은 여전히 신경 쓰이고 관객을 자주 답답하게 만든다. 그러나 작품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중심이 인물에 맞춰져 있다는 사실을 알면 이해의 단점도 어느 정도 상쇄된다. 이것은 에반게리온의 이야기가 아니라, 에반게리온에 탑승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하나씩 부족한 점을 가지고 있던 아이와 어른이 어떻게 타인을 이해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는지에 집중한다면 생각만큼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에반게리온 다카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 나아가, 작품을 감상해왔던 팬을 작품 속으로 포섭시켜버린다. 2시간 30분에 달하는 시간 동안 필름에서는 끊임없이 과거 에반게리온의 잔재가 등장하며 이는 오마주 되거나 일부 가공되고 현실 위에 덧씌워진다. 익숙하고 괴로운 장면은 인간의 플래시백처럼 간헐적으로 등장하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과거에서 눈을 돌릴 수 없으며, 그렇다고 기억을 지울 수도 없는 노릇. 관객은 영화 속에서 자신이 가졌던 추억을 메타(meta)적으로 돌이키게 된다. 그 추억이 추악하거나 황홀하게 표현되지는 않는다. 그저 한때 있었던 일을 생각하듯이 등장했다 사라질 뿐이다. 작품 속 캐릭터들이 건네는 말 역시도, 자신들의 과거뿐 아니라 작품을 사랑했던 관객에게 건네는 말처럼 작용한다. 특히 어리고 부족했거나, 사회에 잘 어울리지 못하고, 혹은 타인과 어울리기를 거부하며 방에 틀어박혔던 오타쿠(마니아)에게 더욱 단호한 메시지다. 관객은 영화 속에서 자신이 즐겨왔던 과거를 마주하게 되며 이별할 기회를 갖는다. <에반게리온 다카포>가 모든 에반게리온에게 작별인사를 하듯이.

 

 물론 인사에는 영화를 만들어 낸 감독인 안노 히데아키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내포한 우울증, 사춘기, 종교, 성적 은유를 품고 꾸준히 사랑받으며 또한 증오받았던 과거를 떠올려보자. 성공한 작품은 부와 명성을 가져다주었겠으나 반대로 짐이나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안노 히데아키가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이것은 그에게도 아름다운 종점이 되리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에반게리온> 시리즈 특유의 배경음악 부조화(Soundtrack Dissonance)는 여전하다. 아름답고 슬프다. 액션씬은 정신이 없고 중구난방이지만, 화려함만은 확실히 챙겼다. 조명과 구도, 인물의 배치는 애니메이션 연출의 극치에 가깝다. 선명한 배경과 색감에서 큰 고찰 없이도 전과는 다른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시절의 메타포 역시 건강한 방향으로 바뀌었다. 전개는 갑작스럽고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오랜 시간 기획하고 만든 작품답게 내용적인 부분을 빼더라도 볼 만한 영화다. 그러나 영화가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변화하는 인간의 삶'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기저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이해도 되지 않고 와닿지도 않는 영화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며, 과거를 인정하고, 결국 이별을 고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건강하고 화려한 피날레가 되겠지만 말이다.

 

 포스터 속에서 과거의 모습을 하고 있는 영화 속 캐릭터들이 이별의 인사를 건넨다. 영화로 에반게리온의 내용을 다시 돌이켜보았다면(da capo), 이제는 끝을 낼 때(fine)가 아닐까. 감독이, 영화 속 인물들이 이별하면 관객도 이야기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다. 물론 26년간 쌓인 이야기를 2시간 30분으로 아름답게 마무리지을 수 있다면 이만한 끝이 없을 테다. 나 역시 해당 리뷰를 통해 매듭을 지으려 한다. 에반게리온이 없어도 인생은 계속되지만, 과거의 추억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만은 잊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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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추

<썬더 포스> 리뷰

2021. 4. 16.

 중년의 여성 두 명이 투 톱 체제로 서 있다. 이 한 문장만으로 영화의 코어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빌런이 일상에 깊게 침투한 사회, 과거 친한 사이였으나 가치관 차이로 소원해진 두 명의 여성은 치열하게 사회를 살아가는 30대가 되어 마주치게 된다. 이들이 다시 만나며 어떻게든 히어로가 되고, 어떻게든 적을 물리쳐 도시를 구한다. 히어로 영화라면 응당 지니고 있어야 할 구성이므로 <썬더 포스>의 내용을 열거하는 데에는 스포일러 딱지를 달 필요가 없어 보인다.

 단 이 영화만의 차별점이 있다면, '2021년에 나온 영화'라는 부분, 그리고 '두 명의 여성'이 주인공이자 히어로가 되어 나서는 작품이라는 지점이다. 원더우먼, 캣우먼, 블랙 위도우가 그렇게나 활약하지 않았나? 그게 왜 차별점이 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썬더 포스> 속의 히어로는 여성이자 다수로 연대하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부분에 있다. 전자는 숭고하고 강력한 영웅적 존재로서의 개인이라면, 후자는 군집이 되어 힘을 발휘하는 작은 사회인 셈이다.

 

 <썬더 포스>의 전개는 특별히 참신한 게 없다. 기승전결이 맞춰져 있고, 히어로는 강력하며, 악당의 술수에 잠시 고전하지만 이내 세계를 구해낸다. 뻔한 내용의 연속이라 시청자가 예측을 하면서 보면 전부 맞아떨어질 정도다. 하지만 이 영화는 내용 자체보다 내용을 다루는 과정에서 대사나 행위 등의 구성 요소에 더 신경을 쓴 것 같다. 전체적인 클리셰를 답습하지만, 그 클리셰를 구성하는 것들은 클리셰가 아니다. 영화의 등장인물은 모두 사회적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불완전함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불완전한 이들이 모여 완전함을 꿈꾼다. 말처럼 잘 돌아가진 않고 딱히 완벽해질 생각도 하지 않지만, 손이 닿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이 제법 친근하게 느껴진다. 중년 여성, 흑인, 미혼모, 동성애자, 후천적 변이를 갖게 된 인간들이 똘똘 뭉친다. 한 사람에게 주어져야 했던 능력은 두 사람의 친구에게 나누어 주어진다. 각자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힘을 합쳐 싸워갈 수밖에 없는 것이 <썬더 포스> 속 히어로가 살아남는 방식이다.

 물론 영화 속 소수의 특수성을 읽어내는 것은 영화를 감상하는 바깥의 인간들이다. 영화 내부에서는 이 모든 것이 특별한 일도 아닌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퀴어 프렌들리와 무관심의 배려가 공존한다. 참 이상적이고 좋은 세상 아닌가. PC 영화의 작위적임이나 B급 문화의 퇴색으로 비판받을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오히려 이러한 정치적 올바름이 영화 감상에 있어 무거운 생각을 하지 않도록 만들어주어 장점이 되기도 한다. <썬더 포스>의 살짝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운 감성이 가벼운 웃음을 주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웃음을 줄 수 없는 요소를 철저히 배각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배경은 일리노이 주의 시카고인데, 지역적 특성과 정치 풍자를 절묘하게 엮어내기도 했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접전처럼 보이는 정치 상황(우파와 좌파의 상징색도 완전히 같다), 백인 남성인 공화당 시장 후보와 흑인 여성인 민주당 시장 후보 등등의 소스가 상기한 소수의 연대성 및 온건 메시지와 엮이며 '민주당 영화'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실제 시카고의 시장인 로리 라이트풋은 흑인이자 동성애자이며 여성이다. 1년 전 미국을 휩쓴 대선까지 고려해보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런 점을 의식하고 만든 영화 같다. 의식하고 보면 글로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이념이 묻어 나오다 못해 뚝뚝 흐르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사족을 달 것도 없이 킬링타임 용으로 제격이다. 보통의 히어로 영화를 기대하고 보면 <썬더 포스>는 제목에 비해 조금 심심한 감이 없잖아 있다. 적당히 흐름상 넘어가는 부분도 많고, 대단한 임팩트가 있는 것도 아닌데 예산이 많이 들어간 영화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을 감안하고 감상하다 보면 크고 작게 웃음을 띌 수 있는 장면이 많다. 삼삼하지만 적당히 재미있다. 사이사이에 들어가는 소수자 해학도 과하지 않은 수준으로만 다뤘다. 인종도 성격도 직업도 다른 두 명의 중년 여성이 손을 잡고 영웅이 되는 이야기는 여전히 질리지 않는다. 앞으로 이런 이야기가 10년은 더 나와야 지겨워질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민주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재미를 느꼈다고 말하고 싶다. 국수주의자나 보수주의자에게 추천할 만한 영화는 아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썬더 포스> 대신 더 잘 만들어진 <슈퍼맨>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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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추

<소울> 리뷰

2021. 2. 2.

 코로나 19의 장기화로 인해 문화·사회가 전반적으로 침체되며 소위 '코로나 블루'라 불리는 신종 우울 증세가 사회에 만연해졌다. 전 세계적인 사건으로 생겨난 우울은 질병의 종식 외에는 명쾌히 해결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받아들이고 포기하며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소울>은 삶의 방식에 있어 꽤 현실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디즈니 영화다. 꿈이나 도전, 용기와 같은 가치가 아니라 '살아가는 데에는 그리 많은 야망이나 꿈이 필요하지 않다', 혹은 '소소하고 작은 기쁨으로 이루어진 일상을 사랑하자'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건넨다. 디즈니의 주 타겟층이었던 유아동이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은 주제다.  

 

 주인공인 '조'는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지만, 한편으로는 재즈 피아니스트로서 연주 생활을 하고 싶다는 내면의 욕망이 존재한다. 그는 그렇게 음악을 하는 것이야말로 제 삶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진정으로 할 일이라 생각한다. 그런 그에게도 기회가 찾아오지만, 영화를 시작한 지 몇 분 채 되지 않아 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그런 그가 태어나기를 거부하는 영혼 '22번'과 만나며 함께 삶의 가치에 대해 깨닫게 된다는 것이 작품의 주 전개다. 

 

꿈 하나만 보고 살아가다 한순간에 좌절해버린 간절한 조와, 냉소적인 부분만 받아들여 살아보기도 전 삶의 의지를 포기한 22번의 견해 및 태도 차이와 시너지가 상당히 재미있다. 영화는 '삶에 의미와 목적이 꼭 필요한지'를 끊임없이 묻는데, 22번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흥미와 의욕을 가지는 과정이 유쾌하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특히 22번의 태도나 모습은 삶의 열정이나 목표를 강요당하고, 우울감과 반향심으로 똘똘 뭉친 우울한 현대인을 생각나게 한다. 이런 이들에게 원대한 목적이나 성취가 아닌, 그저 살아서 걷거나 낙엽이 떨어지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인생에는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사소한 일로도 영혼은 충만해지고, 내일을 기대할 마음이 생길 수 있다. 22번의 생각과 행보는 비록 강렬하게 마음에 남지 않을지언정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변을 둘러보기를 권한다. 원대한 꿈을 위해 움직이던 '조' 역시도 자신의 꿈이나 열정이 인생을 마냥 아름답게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무아지경에 빠져 머나먼 세계로 떠난 사람들도 언젠가는 현실로 돌아와야만 한다. 결국 두 명은 인생에 대한 가치관도 태도도 다르지만, 주어진 크고 작은 일들을 담담히 품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러니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게 어떤 인생이 되더라도.

 

 홍보 당시 재즈 영화라는 이름이 붙었던 것 같지만, 재즈 음악은 영화의 상징과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을 뿐이며 메인 소재로는 쓰이지 않는다. 도리어 재즈는 '자유로움', '즉흥적임', 그리고 '열정'과 같은 키워드를 통해 성공을 갈망하는 예술가 조의 내면을 드러낸다. 모든 것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지금을 즐기라는 메시지가 재즈 음악과 상당히 닮아 있는 느낌이다. 감독의 이전 작인 <코코>에서도 음악이 쓰였지만 <소울>에서는 좀 더 가치관적인 부분과 맞닿아 있어 심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단 <코코>에서의 음악도, <소울>에서의 음악도 주인공의 민족성과 관련이 있다는 점은 같아 보인다)

영화의 중심 주제와 맞닿아 있는 요소 중에는 삶과 죽음 / 냉소적(권태로움)과 열정 / 교직과 연주자와 같은 대비도 있다. 뉴욕의 현실적인 재즈와 사후세계 및 생전 세계의 신비로운 음향 차이, 현실에 안주하는 일과 꿈을 좇는 일의 차이 속에서 영화의 모든 요소가 중간을 찾아가려는 노력을 읽어낼 수 있다. 이런 부분이 정말 디즈니 영화 치고는 매우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반면 영상이나 음악의 완성도, 심오한 메시지와 별개로 디즈니 영화가 포기할 수 없는 가치 역시도 선명하게 보였다. 참 좋기도 했고 아쉽기도 했던 부분인데, 디즈니는 언제쯤 멘토와 멘티의 고정 패싱을 바꿀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영화 내적인 부분에서 어느 정도 설명이 되기도 했지만 필요한 만큼만의 다양성을 챙긴 것 같아 안타까웠다. 삶을 받아들이며 살아가자는 소시민적 메시지를 내포한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이 전부 소수자라는 점에서 약간의 의문이 남는다. 작품 외적인 시선에서 보면 아쉽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생각하자면 이런 메시지를 기득권이 전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나마 다행이다)

 

 “뉴욕에서는 멈춰서는 안 돼. 계속 걸어.” 몸이 뒤바뀐 상황에서 조는 22호에게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갈 것을 종용한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만 무작정 바삐 걷는 모습이 보인다. 그것은 평범한 사람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도 같다. 멈춰 서거나 눈에 띄는 일을 하면,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것에 귀를 기울이면 마치 뒤처지거나 제외될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이 존재하니까. 뉴욕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갈 곳 없이 떠도는 인생을 실패한 것으로 간주한다. 꿈과 목표, 열의가 없다면 가치 없는 인생이 되는가? 그렇기에 멈추지 말고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해야 하는가? 안개처럼 떠도는 현대인의 불안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세계는 이룩하는 사람을 원한다. 그러나 그 방식에 맞추어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 저돌적인 삶이 마냥 행복하다고도 볼 수 없다. 22호의 말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단순히 맛있는 것을 먹거나 좋은 길을 걸어보기 위함일 수도 있다.

쉽게 살아가는 사람이 없고 마주하는 누구나 고민과 우울로 처지는 현재, <소울>은 불행 속 작은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영혼의 길을 터주는 역할을 한다. 깊은 충격을 남기지는 않지만 영화는 우리처럼 꿋꿋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괜히 굴러다니는 낙엽이나 떠 있는 구름을 한 번쯤 쳐다보게 만든다. 사회적 침체기에 개봉해 더욱 빛나는 작품. 더도말고 덜도 말고 딱 지금 시기에 보기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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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추

<봄의 저주> 리뷰

2020. 10. 4.

!!작품의 스포일러 있음!!





 봄은 생명이 움트는 계절이다. 길고 긴 추위와 고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작이 열리는 때라고도 한다. 그러나 무언가가 시작된다는 것은, 시작되기 전에 끝이 난 것도 존재한다는 이야기<봄의 저주> 속에서 모든 일의 발단하루(春) 죽음으로 시작을 끊는다. 생명의 약동을 상징하는 봄에 어떠한 생명이 '죽음'으로써 만화가 '시작'된다는 사실은 퍽 모순적이고 재미있는 부분이다. <봄의 저주>는 코니시 아스카 작가의 첫 번째 작품인데, <내세에는 남남이 좋겠어>라는 학원물 순정(?)만화로도 상당히 유명하다. 작가는 부도덕함 사이에서 오가는 인간의 극단적 감정을 그려내기를 상당히 좋아하는 듯도 하다. 단 <내세에는 남남이 좋겠어>가 엽기적이고 폭력적인 스타일로 부도덕의 뒷세계를 그려내고 있다면, <봄의 저주>는 인간의 부도덕한 감정과 휴머니티에 집중했다고 할 수 있겠다.


 주인공 나츠미는 어느 해 봄,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여동생 하루를 잃는다. 단 19세의 나이에 죽고 만 것이다. 이 일로 크게 충격을 받아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나츠미에게, 하루와 교제하던 남자(토고)가 접근해 교제를 제안한다. 죽은 여동생의 연인과 교제한다는 사실에 깊은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나츠미는 이를 받아들인다. 단 '하루가 갔던 장소에 자신도 가고 싶다'는 한 가지 조건을 걸고. 두 명은 하루라는 접점을 가진 채 기묘한 교제를 시작한다.


 <봄의 저주>는 부도덕한 사건 앞에서 당사자들이 겪게 되는 '죄책감'과, 이를 극복하거나 극복할 수 없게 만드는 '삶의 의무' 및 '삶의 욕구'에 대해 이야기한다. 단순히 죽은 여동생의 연인과 교제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츠미와 토고는 죄악감과 배덕을 느낀다. 그러나 이 부도덕한 행위는 두 명에게 있어 다른 무게감을 가진다. 나츠미와 토고에게 있어 여동생인 하루의 존재 의의가 달랐기 때문이다. 여동생인 하루를 삶의 욕구로써 원동력으로 삼은 나츠미, 반대로 하루의 존재를 평탄한 삶의 의무처럼 받아들인 토고는 각자 죄책감에 휩싸인다. 그러나 더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나츠미였다. (작중에서는 구체적인 이유를 말하지 않았으나, 나츠미가 하루를 사랑하는듯한 유사 근친적 구도를 연출한다)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할 사랑을 연달아 거듭하는 나츠미는 죄책감에 빠져 삶을 포기할 마음을 가지기에 이르기도 한다. 하루에 대한 죄책감은 심리적 위축을 뛰어넘어 마치 '저주'처럼 여겨진다. 반면 토고에 있어 '삶의 욕구'는 하루가 아닌 나츠미였다. 그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죽은 사람은 슬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봄의 저주> 속에서 두 인물의 욕구와 의무, 죄악은 몇 번이고 교차하거나 맞부딪치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결국 나츠미는 죄책감이나 삶의 의무보다 살아가야 할 어떤 이유를 우선시한다. 이는 <봄의 저주>가 피력하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다. 죄책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게 당연하다. 나츠미가 꾸준하게 언급하는 '저주'처럼 사람을 옭아매고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드는 것도 그렇다. (물론 죄악감을 느끼게 된 결정적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이 부도덕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의식, 즉 양심의 가책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죄책감에 물들어 죽을 필요는 없다. 토고의 대사 그대로 도덕의 죄를 저지른 이들은 "저주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동시에 "저주가 풀리는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죽은 사람이 저주를 내렸을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지만, 살아있는 한 죄책감은 평생 갈 거라는 이야기다. 만화 속 시간적 배경 역시 계절의 순환을 통해 두 명의 미래에 또다시 하루로 인해 고통스러워지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찾아올 봄을 끊임없이 이겨내며 살아야 하는 것도.

미래의 행복은 단언할 수 없으나, 사람은 죄책감을 안고 끝까지 살아간다. 이는 의무라기보다 죄책감도 모두 포용하고 살아가기로 하는 욕심에서 기인한다. 개인적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가야 한다는 생명 예찬의 메시지를 좋아하는 편이다. <봄의 저주> 속 욕망과 죄책감의 갈등은 노골적으로 연출된다. 다소 극단적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그만큼 정직하고 솔직한 삶의 이야기다. (별개로 잘못을 안고 생을 지속한다는 결말 자체가 일본 작품에서 보기 드물어 좀 신기하기도 했다)


 코니시 하루카 특유의 가늘고 날카로운 그림체, 극단적 상황에서의 감정 연출도 돋보인다. 특히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모두 가지고 있는 나츠미가 입체적으로 표현된다. 해맑은 척을 하지만 속으로는 죄책감으로 무너지고 있는 나츠미, 무뚝뚝하고 다소 평면적인 인상이지만 속으로는 유일한 열망이 있는 토고의 대비도 곱씹을 만하다. 1권과 2권의 표지는 관계성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도입이나 장면의 선택이 자극적인 부분도 있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 아닌가? 딱 이 정도의 연출과 결말이 좋다. 같은 작가의 연재 중 작품인 <내세에는 남남이 좋겠어> 쪽은 이와 비교해보면 좀 더 부도덕함에 대해 고찰하지 않고 오락성을 극대화한 편이다. 작가가 선호하는 이야기의 근원(부도덕성)과 작풍을 제외하면 두 작품 간의 괴리가 상당히 심하기도 하다. <봄의 저주>를 본 뒤 비슷한 분위기를 생각하며 <내세에는 남남이 좋겠어>를 읽는 것은 비추천.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쪽이 조금 더 건전하다.


 봄이 시작되는 계절이라면, 여름은 시작한 것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계절이다. 봄의 저주가 있더라도 나츠미는 살아가기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두 명의 이름과 제목의 연관성이 묘하게 다가온다. 부도덕한 작품 특유의 배덕감을 기대하고 본다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한 번 쯤 읽어볼 만한 만화다. 죄책감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을 만큼 나를 살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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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전후는 사회·문화적으로 격동의 변화가 있었던 시기이다. 특히 코로나 19는 우리의 삶을 180도로 바꿔놓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접촉을 극도로 경계해야 하는 전염병의 특성상, 공연 업계는 막대한 손실을 입어야 했고, 오랜 침체 또한 결국 질병의 종식이 아닌 만연화를 통해 종지부를 찍었다. 무대에 설 수 없어도 예술활동은 생계이자 삶이기에, 많은 음악가는 유튜브나 SNS를 통해 대중에게 열린 음악회를 제공하고자 부단히 노력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공연문화가 어느 정도 정상궤도에 올라온 지금은 어떨까. 티켓파워를 통한 수익이 중심인 이상, 대부분의 공연은 다시 오프라인 형태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네트워크 공간을 통한 사이버 공연 문화가 사장되지도 않았다. 공유를 통해, 쉬운 접근을 통해 공연―특히 ..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 리뷰

이 방영을 시작한 지는 26년, 시리즈가 시작된지는 1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의 후속으로 끝맺음이 나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9년이다. 어린 나이에 작품을 보기 시작한 사람이 어엿한 사회인이 될 정도의 기간인 셈이다. 그렇게 한 인간이 성장하는 동안, 삶을 구성하는 많은 것들은 바뀌고 흩어져 과거가 된다. 세기말에 등장했던 작품이 퇴장하는 방식은 우리가 나이 들어가며 기억을 추억으로 바꾸는 것과 별반 다름이 없어 보인다. 포스터에서 고하듯이, 에반게리온은 바뀌어가는 인간의 과거를 보내는 장대한 이별식으로 끝을 맺기 때문이다. 이전까지의 신극장판의 주된 비판점은 관객을 이해시키지 않는 무논리성이었다. 꾸준하게 비판을 받으면 고려할 법도 한데, (이하 에반게리온 다카포)는 과감하게 앞으로의 설명을 모두 ..

<썬더 포스> 리뷰

중년의 여성 두 명이 투 톱 체제로 서 있다. 이 한 문장만으로 영화의 코어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빌런이 일상에 깊게 침투한 사회, 과거 친한 사이였으나 가치관 차이로 소원해진 두 명의 여성은 치열하게 사회를 살아가는 30대가 되어 마주치게 된다. 이들이 다시 만나며 어떻게든 히어로가 되고, 어떻게든 적을 물리쳐 도시를 구한다. 히어로 영화라면 응당 지니고 있어야 할 구성이므로 의 내용을 열거하는 데에는 스포일러 딱지를 달 필요가 없어 보인다. 단 이 영화만의 차별점이 있다면, '2021년에 나온 영화'라는 부분, 그리고 '두 명의 여성'이 주인공이자 히어로가 되어 나서는 작품이라는 지점이다. 원더우먼, 캣우먼, 블랙 위도우가 그렇게나 활약하지 않았나? 그게 왜 차별점이 되는 걸까? 그것은 바로 ..

<소울> 리뷰

코로나 19의 장기화로 인해 문화·사회가 전반적으로 침체되며 소위 '코로나 블루'라 불리는 신종 우울 증세가 사회에 만연해졌다. 전 세계적인 사건으로 생겨난 우울은 질병의 종식 외에는 명쾌히 해결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받아들이고 포기하며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은 삶의 방식에 있어 꽤 현실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디즈니 영화다. 꿈이나 도전, 용기와 같은 가치가 아니라 '살아가는 데에는 그리 많은 야망이나 꿈이 필요하지 않다', 혹은 '소소하고 작은 기쁨으로 이루어진 일상을 사랑하자'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건넨다. 디즈니의 주 타겟층이었던 유아동이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은 주제다. 주인공인 '조'는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지만, 한편으로는 재즈 피아니스트로서 연주 생활을 하..

<봄의 저주> 리뷰

!!작품의 스포일러 있음!! 봄은 생명이 움트는 계절이다. 길고 긴 추위와 고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작이 열리는 때라고도 한다. 그러나 무언가가 시작된다는 것은, 시작되기 전에 끝이 난 것도 존재한다는 이야기. 속에서 모든 일의 발단은 하루(春)의 죽음으로 시작을 끊는다. 생명의 약동을 상징하는 봄에 어떠한 생명이 '죽음'으로써 만화가 '시작'된다는 사실은 퍽 모순적이고 재미있는 부분이다. 는 코니시 아스카 작가의 첫 번째 작품인데, 라는 학원물 순정(?)만화로도 상당히 유명하다. 작가는 부도덕함 사이에서 오가는 인간의 극단적 감정을 그려내기를 상당히 좋아하는 듯도 하다. 단 가 엽기적이고 폭력적인 스타일로 부도덕의 뒷세계를 그려내고 있다면, 는 인간의 부도덕한 감정과 휴머니티에 집중했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