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리뷰

2023. 10. 27.

 

 

 미야자키 하야오는 끊임없이 대중에게 살아가는 방법에 관한 질문을 던진 감독이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계보를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 감독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를 보자. 욕망으로 점철된 인간이 무의미한 전쟁을 통해 자연적 삶을 파괴하려 든다. 이에 주인공인 '나우시카'는 그 모든 행위가 그저 자기 파괴적일 뿐이며, 진정 해야 할 일은 자연과 함께하는 것이라 말한다. 돌이켜보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작품 속에서 항상 숲, 바다, 늪, 호수, 그에 기생해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를 공들여 표현했으며 그들을 지켜야 한다고 설파해 왔다. 그런데 이 생태계에는 인간 역시 포함된다. 타 지구 구성원들과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지만, 엄연히 인간 또한 지구를 구성하는 일원인 셈이다. 그렇기에 감독은 영화에서 우리 인간에게도 소중함을 전달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다소 도발적인 제목에, 요시노 겐자부로의 책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원작으로 삼고 있으나 사실상 원작과의 내용 공통점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오히려 이 영화는 원작의 의도대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여 다정한 설교를 하려는 듯 보인다. 약간의 문제가 있다면, 이 영화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특성을 잘 알지 못하면 반쪽짜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는 지점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전쟁 이후 새로 태어난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살아가는 방식에 던지는 질문이다. 스튜디오 지브리 및 그 전신을 포함, 전쟁을 묘사한 영화로는 크게 <반딧불이의 묘>, <바람이 분다>, <붉은 돼지>가 있다. 이중 <반딧불이의 묘>는 타카하타 이사오가 감독을 맡았으며, 전쟁은 매우 처참하고 끔찍한 행위로 표현된다. 반면 <바람이 분다>와 <붉은 돼지>에서는, 최소한 전쟁에 쓰이는 전투기(비행기)에 대한 로망이나 멋을 가지고 있다는 게 은근히 느껴질 정도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반전주의를 표방하는 좌파 예술가로 대표되지만, 한편 <붉은 돼지>를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을 정도로 전투기를 좋아하는 면모가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제 모순적 성향을 모두 영화로 풀어내길 선택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 영화에서 전쟁이란 부정적 면모, 인정하고 극복해 내야 할 과거의 것으로 그려진다.

 

전쟁피해자로서 가족을 잃은 주인공 마히토는, 종전으로 향해가는 길에 놓인 새어머니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극구 부인한다. 그의 기억은 공습 당시 자신의 가족이 죽었던 순간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던져지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달랐다. 마히토는 결국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기로 한다. 여기서 벗어나기로 한 것은 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현재를 가꿀 거름으로 삼겠다는 의미에 가깝다.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 속의 반전주의는 때로 일본의 자기 위로로 치부되곤 하나, 이 감독은 항상 영화의 등장인물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해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편이 좋다. 화평할 수 없기 때문에 전쟁이 나쁜 것이 아니라, 종국에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구분할 수 없게 될 정도로 서로를 좀먹기 때문에 나쁜 것이다. 반면, 영화 속 세계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전쟁과 반대되는 자연 생태계의 근간을 남겨둔다. 살아남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먹거나 잡아먹는 행위이다. 이는 감독의 여러 작품에서 드러난 주제이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직접적인 대사를 통해 말한다. ‘교활함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생태계의 순환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전쟁은 그 자연스러움을 파괴하고 세계를 지옥처럼 만들어버린다. 그렇기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묻는다. 인간, 특히 주인공 마히토로 대표되는 우리들 인간은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대답은 어렵지 않다. 악의와 선의는 명확히 구분해 낼 수 없고, 한 사람이 가진 악의와 선의도 다양하므로, 완벽히 분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두 가지의 혼돈을 잘 다스리기 위해 비슷한 처지의 친구를 만들면 되는 일이다. 전쟁으로 시작되어, 마히토가 겪은 모든 불합리함은 결국 같은 인간 혹은 생명과 어우러지며 해소된다. 만들어진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생명과 관계하며 살아가는 것, 그 사이에서 올바름을 찾는 것―즉, 전쟁과 같은 명확한 악의를 멀리하는 것ㅡ이야말로 살아가야 할 방식이라는 소리다.

 

작품이 건네고 싶은 메시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게 전부였다. 돌이켜보면 매우 간단한 데다 항상 미야자키 하야오가 표현하고 싶었던 주제다. 이번 영화에서는 더 확실하게, 직접적으로 언어를 빌려 표현했을 뿐이다. 알게 되면 조금 김샐 수도 있겠다. 그러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성향, 그의 필모그래피 속 표현방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정확하게 전달되었을지가 의문이다. 화면 구성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 특성상, 영상을 뜯어보고 대사까지 체크하기엔 시간이 매우 부족하게 느껴진다.

 

 

 

 또한 이 영화에는 스튜디오 지브리, 그리고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전적 특성도 포함되어 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는 질문은 단순히 청소년들에게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자신과 스튜디오 내부 사람들에게 함께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일본 장편 애니메이션 계는 오래도록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 및 노화 이후 일명 후계자를 찾기 위한 미증유의 여정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자주 거론되는 신카이 마코토, 호소다 마모루 등, 누군가가 거장이라 불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뒤를 이어 흥행과 동시에 독특한 작품세계를 계속해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겠다.

 

 한 사람의 영향력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제작사인 스튜디오 지브리는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영화는 작중 인물의 입을 빌려, ‘이 세계는 오래가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스튜디오 지브리 설립 및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준 타카하시 이사오가 향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5년째다. 스튜디오 지브리는 제작팀이 해산되고, 타 기업으로의 매각 절차를 밟고 있다. 자신만의 세계를 발견해 가꾸어가고 있었으나 세대 변혁과 세계 변화 속에서 스튜디오 지브리의 가치 역시 영원할 수 없는 법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을 둘러싼 인간관계와 자회사의 상황을 전부 이 작품에 함께 녹여낸 것 같다. 결국 그의 자리를 이어 줄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이는 감독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같기도 하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오래도록 자신의 가치관인 '반전주의', '에코이즘'을 표방하며 작품을 통해 이를 전파했다. 이를 마주하는 대중이 동조해 주기를 바랐지 않았을까. 그러나 감독이 보아온 사람들은 고개를 돌리면 금방 잊어버리고, 그 속의 메시지를 기억하지 못했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작품은 ‘어차피 잊어버릴 것’이라고 말한다. 거의 확신에 가까운 투다. 그러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처럼 돌아서서 바로 잊는 일은 없다. 주인공인 마히토가 모험의 대단원에서 무언가를 얻은 것처럼, 관객도 분명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영화는 극장에 걸려 상영된다.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과 질문을 전한다. 그리고 마침내 제 역할을 마쳤다고 여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를 결심하고 만든 작품인 만큼, 더 확실하고 노골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줏대 있게 이어간다. 전쟁을 경험하고, 개발로 인한 파괴를 겪은 노인의 충고가 아름다운 시청각을 입은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자연주의적 상징을 모성, 특히 생명의 탄생 과정과 엮는 방식도 여전하다. 우스꽝스럽고 무식하기까지 한 자연의 파괴자이자 개발자―에코페미니즘적 관점에서의 가부장도 여전하다. 이 뻔하고 당연한 감독의 방식을 좋아한다면 반가운 격언이겠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두리뭉실한 잔소리로 들릴 법하다.

 

 그럼에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에 온점을 찍었음에도 나아감을 그만두지 못하고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하고자 결심한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떤 심정일까. 그에게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 이상으로 뭐가 남아 있는 걸까. 자전적이고, 어쩌면 당연하고, 지루하며 고루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이 작품은 개봉된 순간부터 누군가 던져주어야 할 질문을 충실하게 번복하고 있다. 영화관까지 발걸음 하여 이 이야기를 보고 들을 사람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그 답은 이미 영화 속에 제시되어 있다. 답을 보면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파괴를 멈추고 상생을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수십 년간 미야자키 하야오가 우리에게 보여준 한 가지 길이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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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추

<TAR> 리뷰

2023. 3. 11.

 

 

 2020년 전후는 사회·문화적으로 격동의 변화가 있었던 시기이다. 특히 코로나 19는 우리의 삶을 180도로 바꿔놓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접촉을 극도로 경계해야 하는 전염병의 특성상, 공연 업계는 막대한 손실을 입어야 했고, 오랜 침체 또한 결국 질병의 종식이 아닌 만연화를 통해 종지부를 찍었다. 무대에 설 수 없어도 예술활동은 생계이자 삶이기에, 많은 음악가는 유튜브나 SNS를 통해 대중에게 열린 음악회를 제공하고자 부단히 노력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공연문화가 어느 정도 정상궤도에 올라온 지금은 어떨까. 티켓파워를 통한 수익이 중심인 이상, 대부분의 공연은 다시 오프라인 형태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네트워크 공간을 통한 사이버 공연 문화가 사장되지도 않았다. 공유를 통해, 쉬운 접근을 통해 공연―특히 서양 클래식 음악 공연을 친근하게 제공하려는 노력 또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이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 및 생산하는 것은 소위 국내에서 MZ세대라고 불리는, 젊은 예술가들이다.

 한편, 2010년대 중반부터 일어난 사회적 현상 중 하나인 '미투 현상' 역시 사회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현재까지도 고발과 폭로를 통한 권력형 성범죄가 낱낱이 밝혀지고 있다. 공연계는 이 사회 현상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공연계 특성상 지도자와 그의 인맥이 생계와 직업활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에, 이전까지만 해도 범죄 사실이 공개적으로 밝혀지지 않거나 관계자들에 의해 깊이 은폐되어 왔기 때문이다. 국외를 막론하고 수많은 교수, 연주자, 혹은 예술가들의 치부가 밝혀지며 사회가 충격에 술렁였던 것이 그리 멀지 않은 일이었다. 심지어 지금도 크고 작은 성범죄 고발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상기한 사회적 변화는 단연코 순수예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아도 좋겠다. 긴 역사와 암묵적 규칙이 존재하고, 생존을 위해 커넥션이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특정하여 말하자면, 서양 클래식 음악계야말로 코로나 19로 인한 공연 침체와 내부 고발을 통한 도덕적 질문을 피해 갈 수 없는 가장 큰 목표물이라고 볼 수 있다. <TAR 타르>는 가상으로 꾸며진 베를린 필하모닉의 여성 지휘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 몰락해 가는지를 158분간 가감 없이 드러내는 형태의 영화다. <다음영화>의 시놉시스 내용 그대로, “무대를 장악하는 마에스트로, 욕망을 불태우는 괴물, 베를린 필하모닉 최초의 여성 지휘자 리디아 타르”가 정점에 섰을 때를 시작으로 한다. 영화 속에서 위대한 인물이자 이상을 좇는 예술가, 혹은 협회의 설립자, 동성 부부의 파트너로서 리디아 타르는 자신의 욕망을 뒤쫓아 서서히 무너져간다. 선대의 음악가들을 따라 진정한 음악과 그것의 철학적 의미를 고찰하지만, 음악에게 바치는 순수한 마음은 그의 독단적인 선택과 순간의 충동으로 더럽혀지고 만다. 결국 주류 사회에서 추방되고 변방으로 여겨지는 필리핀에 도달해서야, 자신의 민낯을 발견하고 겸허한 초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주인공인 리디아 타르는 복합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나 만약 영화감독이 '여성이자 레즈비언인 지휘자'를 통해 영화적 메시지의 전복을 꾀한 것이라면, 개인적으로는 무용한 일이었다 주장하고 싶다. 타르는 인터뷰에서 여러 여성 지휘자들의 이름을 거론하고, 여성 음악가의 후원을 통해 자기 자신을 여성적 계보를 이어갈 음악가처럼 표방한다. 그러나 음악가이자 가족으로서 타르가 선택한 방식은 명백히 가부장적이다. 이는 자신을 '아빠'라고 소개한 부분,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아카데미의 존재가 고루하다고 지적하는 부분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지휘자는 모든 악기를 아우르고 그것을 통솔한다는 지점에서 지배적인 역할, 즉 남성성의 젠더를 입고 있었다. 유명한 여성 지휘자, 특히 객원이 아닌 고정 지휘자의 출현이 현대까지도 드문 일로 여겨지는 것처럼, 음악사 속에서 남성적 젠더의 역할은 여성 음악가에게 쉽사리 허용된 적이 없다. 여성 음악가들은 극도의 제한을 타파하기 위해 두 가지 전략을 사용하였다; 하나는 강력한 여성성을 표방하여 '심벌'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남성성을 표방하여 그들과 '동류'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타르가 선택한 방식은 명백히 남성주의적 역할을 입고 스스로가 '남성'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의문인 부분은 여기서부터다. 타르는 이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가지거나 불만을 토로한 적이 없다. 오히려 젠더나 성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여성 속의 남성'을 언급하며 미러링을 시도한다.

 만일 현실 속 서양 음악계가 실제로 여성 주도적이었다면, 혹은 영화 내용과 같이 그 경계가 모호해졌다면 이는 효과적인 전복의 의도였을 수 있다. 영화배우의 대사가 진지한 고찰과 메타인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3년 현재에도 서양 클래식 음악계의 주축은 남성 음악가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젠더음악학이 활발해진 지금까지도 업계 내부의 실질적 성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결부시키지 않을 수 없겠다. 권력과 지위를 가진 다수의 위인은 현재까지도 남성 음악가이며, 대부분의 성범죄 또한 권위적 남성 음악가에 의해 이루어졌다. 타르는 여성의 날 날짜조차 알지 못하며, 그저 여성 음악가로 구성된 아카데미를 설립했을 뿐인 인물로, 작품 내부에서 보이는 행위와 방식은 사실상 가부장적 남성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남성적 젠더를 입은 여성 음악가의 경솔한 행동과 범죄, 그리고 몰락과 작금의 현실을 함께 보면 마이너리티를 통한 메시지 전달이 그다지 큰 의미를 지닐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똑같은 행위를 남성 음악가로 재현시켰다면 더 최악이었겠다. 영화가 아닌 그저 한 편의 다큐멘터리에 불과했을 테니까. 

 

 그렇다면 주인공의 메이저리티는 어떠한가? 사실 타르는 서양 음악계에서 이례적으로 '여성'이며 '레즈비언'인 것을 제외하면 삶 대부분이 전형적인 유럽 예술가의 형태로 구성된 인물이다. 독일, 미국과 같은 서양 음악의 메카를 경유하며 음악 활동을 이어온 한편, 학위를 위해 소수민족의 민요를 채집한다. 또한 작중 꾸준히 LP판을 통한 녹음을 선호하고, 유튜브나 SNS 등의 매체를 꺼려하는 행태는 아날로그를 선호하는 기성세대 예술인으로서의 특성을 견고히 한다. 코로나 19로 인해 달라진 공연계의 양상 속에서도 그는 과거의 방식을 고집하며, 거장의 예술 속에 갇혀있다. 말러를 존경하는 타르와 엘가로 대표되는 올가의 차이는 특히 이 부분에서 두드러진다. (에드워드 엘가 또한 신세대의 작곡가는 아니지만 말이다) <타르> 속 많은 젊은 예술가가 그들의 행동, 혹은 가치관을 통해 주인공과의 대립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이해할 수 없는 타자적 시선에서 다루어진다. 시시각각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영상을 찍고, 자유롭게, 혹은 방종한 젊은이들은 영화 내적으로 '못마땅한' 존재로 재생성됨과 동시에 외적으로 중립을 무너뜨린다. 기존 서양 클래식 음악계 역시 신세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편인데, 이 영화에서는 해당 현실을 답습할 뿐 아니라 예술가를 파멸하게 하는 장치로써 다소 이해심 없이 사용된 바가 있다.

 <타르>는 부패한 권력자의 몰락을 다큐멘터리적인 시선으로 담은 것이 맞을까. 이 영화 속에서 다소 경솔하게 다루어진 것은 젠더적인 측면과 코로나 19로 인한 젊은 세대 음악가의 부상뿐만이 아니라고 본다. 타르의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영화 말미 필리핀에 대한 묘사와 그곳에서의 인물상이야말로 작품의 객관성을 떨어트리고 엘리트 예술인 이외의 존재 타자화에 앞장선다. 타르가 성매매 업소에 들어 아이를 보고 나서야 자신을 궁극적으로 깨닫고 역겨움을 느끼는 장면은 노골적임과 동시에 의문을 갖게 만든다. 클래식 음악 후진국이라 여겨지는 남아시아로의 이직을 통해 몰락과 재기를 그려내는 것은 다분히 무지한 메이저리티의 상상력이 낳은 결과물일 것이다.

 

 긴 러닝타임 내내 케이트 블란쳇은 놀라울 정도로 영화를 이끌어간다. 영어와 독일어를 섞어가며 권위주의적인 지휘자를 연기하는 능력은 이 영화의 가장 멋진 점이자 대단한 장점이다. 그러나 반대로 말해, 이 영화에서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배우의 카리스마를 제외했을 때를 가정한다면 그다지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실제 클래식 음악계가 여전히 안고 있는 성차별과 착취 문제에 접근하였으나, 전복을 통해 유의미한 담론을 형성할 수는 없다. 위에서 말했듯이 여전히 남성 권위자 중심적인 서양 음악계에서 소수자인 여성이 미러링으로 조명받기에는 시기상조다. 중립적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취하고 이 태도를 견지하고자 했다면 작품 속 마이너리티로 대표되는 타자의 묘사를 더 신중히 해야 했다. 다른 요소를 모두 제외하고 오직 음악적 메시지를 통해 <타르>를 판단하기도 어렵다―이제 예술과 예술가에게는 순수한 예술성뿐 아니라, 도덕윤리가 마땅히 요구되기 때문이다. 음악가의 혐오와 음악의 아름다움을 분리하고자 하는 작중 타르의 태도는, 문화를 소비하고 연구하는 입장에서 누구도 올바른 답을 내릴 수 없는 가치이기도 하다. 감상 끝에 이 영화는 반여성주의적이지도, 지극히 순수예술적이지도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모든 메시지와 소수성을 애매하고 얕게 사용한 결과, 감독의 의도는 파악했으나 그것을 관철하기에 뒷받침이 부족한 영화가 된 것 같다. 영화 초반에 음악적으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기는 하나, 그것은 순수 음악에 관한 관철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타르가 맞이하게 될 몰락의 미래를 극적으로 비추는 도구적 역할에 불과하다 하겠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권력자에게서 일어나는 학대와 착취, '갑질'은 만연히 존재하며 업계를 발전시키고 올바르게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사항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양 음악계에서는 아직 여성이 몰락할 자리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2023년 현재까지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는 남성이며, 1882년 설립 이후 여성 악장이 임명된 것은 2023년 2월 7일의 일이다. 영화 속 대사를 인용하고자 한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영화 <타르>는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 같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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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추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 리뷰

2021. 8. 30.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방영을 시작한 지는 26년, <에반게리온 신 극장판> 시리즈가 시작된지는 1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에반게리온 Q>의 후속으로 끝맺음이 나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9년이다. 어린 나이에 작품을 보기 시작한 사람이 어엿한 사회인이 될 정도의 기간인 셈이다. 그렇게 한 인간이 성장하는 동안, 삶을 구성하는 많은 것들은 바뀌고 흩어져 과거가 된다.

세기말에 등장했던 작품이 퇴장하는 방식은 우리가 나이 들어가며 기억을 추억으로 바꾸는 것과 별반 다름이 없어 보인다. 포스터에서 고하듯이, 에반게리온은 바뀌어가는 인간의 과거를 보내는 장대한 이별식으로 끝을 맺기 때문이다.

 

 이전까지의 신극장판의 주된 비판점은 관객을 이해시키지 않는 무논리성이었다. 꾸준하게 비판을 받으면 고려할 법도 한데,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 (이하 에반게리온 다카포)는 과감하게 앞으로의 설명을 모두 포기해버린다. 관객에게 이야기의 전개를 납득시키는 대신, 이야기의 결말로 이끌어가기를 선택한 것이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어떤 식으로 세계가 변화했는지, 변화 지점의 주요 원인이 무엇인지는 그저 두리뭉실한 언어로 지정되었을 뿐 누구도 자세히 말하려 하지 않는다. 상기한 점은 여전히 신경 쓰이고 관객을 자주 답답하게 만든다. 그러나 작품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중심이 인물에 맞춰져 있다는 사실을 알면 이해의 단점도 어느 정도 상쇄된다. 이것은 에반게리온의 이야기가 아니라, 에반게리온에 탑승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하나씩 부족한 점을 가지고 있던 아이와 어른이 어떻게 타인을 이해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는지에 집중한다면 생각만큼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에반게리온 다카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 나아가, 작품을 감상해왔던 팬을 작품 속으로 포섭시켜버린다. 2시간 30분에 달하는 시간 동안 필름에서는 끊임없이 과거 에반게리온의 잔재가 등장하며 이는 오마주 되거나 일부 가공되고 현실 위에 덧씌워진다. 익숙하고 괴로운 장면은 인간의 플래시백처럼 간헐적으로 등장하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과거에서 눈을 돌릴 수 없으며, 그렇다고 기억을 지울 수도 없는 노릇. 관객은 영화 속에서 자신이 가졌던 추억을 메타(meta)적으로 돌이키게 된다. 그 추억이 추악하거나 황홀하게 표현되지는 않는다. 그저 한때 있었던 일을 생각하듯이 등장했다 사라질 뿐이다. 작품 속 캐릭터들이 건네는 말 역시도, 자신들의 과거뿐 아니라 작품을 사랑했던 관객에게 건네는 말처럼 작용한다. 특히 어리고 부족했거나, 사회에 잘 어울리지 못하고, 혹은 타인과 어울리기를 거부하며 방에 틀어박혔던 오타쿠(마니아)에게 더욱 단호한 메시지다. 관객은 영화 속에서 자신이 즐겨왔던 과거를 마주하게 되며 이별할 기회를 갖는다. <에반게리온 다카포>가 모든 에반게리온에게 작별인사를 하듯이.

 

 물론 인사에는 영화를 만들어 낸 감독인 안노 히데아키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내포한 우울증, 사춘기, 종교, 성적 은유를 품고 꾸준히 사랑받으며 또한 증오받았던 과거를 떠올려보자. 성공한 작품은 부와 명성을 가져다주었겠으나 반대로 짐이나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안노 히데아키가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이것은 그에게도 아름다운 종점이 되리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에반게리온> 시리즈 특유의 배경음악 부조화(Soundtrack Dissonance)는 여전하다. 아름답고 슬프다. 액션씬은 정신이 없고 중구난방이지만, 화려함만은 확실히 챙겼다. 조명과 구도, 인물의 배치는 애니메이션 연출의 극치에 가깝다. 선명한 배경과 색감에서 큰 고찰 없이도 전과는 다른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시절의 메타포 역시 건강한 방향으로 바뀌었다. 전개는 갑작스럽고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오랜 시간 기획하고 만든 작품답게 내용적인 부분을 빼더라도 볼 만한 영화다. 그러나 영화가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변화하는 인간의 삶'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기저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이해도 되지 않고 와닿지도 않는 영화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며, 과거를 인정하고, 결국 이별을 고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건강하고 화려한 피날레가 되겠지만 말이다.

 

 포스터 속에서 과거의 모습을 하고 있는 영화 속 캐릭터들이 이별의 인사를 건넨다. 영화로 에반게리온의 내용을 다시 돌이켜보았다면(da capo), 이제는 끝을 낼 때(fine)가 아닐까. 감독이, 영화 속 인물들이 이별하면 관객도 이야기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다. 물론 26년간 쌓인 이야기를 2시간 30분으로 아름답게 마무리지을 수 있다면 이만한 끝이 없을 테다. 나 역시 해당 리뷰를 통해 매듭을 지으려 한다. 에반게리온이 없어도 인생은 계속되지만, 과거의 추억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만은 잊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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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드볼/리코타

피아노의 이중성 : 누구나 기억하지만 누구나 가질 수 없는 악기

2021. 6. 3.

1. 서론

 그 어떤 서양음악의 악기도 피아노만큼 대중적이지 못하다. 88개의 검고 하얀 건반으로 구성된 이 악기는 소규모 실내를 위한 업라이트의 형태로, 또는 공연장의 연주를 위한 그랜드의 형태로, 때로는 피아노와 유사한 전자 키보드의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위치상으로는 교실 한구석에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질 않나, 다목적 건물의 강당에도 마치 필수 인테리어 소품처럼 구석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연주에 대해 흥미가 있거나 갓 배워보려 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로 피아노를 추천받게 된다. 1990년대, 혹은 그보다 일찍 태어났으며 교육에 깨나 열을 올린 한국인 가정의 자제라면 지겹도록 드나든 피아노 학원과 소나티네를 기억하고 있을 수 있다. 우리들은 칸칸이 나누어진 건물의 한 층에서 어지럽게 섞인 피아노 소리를 들어본 경험을 공유한다.

 이렇듯 피아노는 마주하기 쉬운 편에 속하지만, 반면 소유하기 어려운 악기이기도 하다. 피아노를 구매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제약이 뒤따른다. 우선 휴대가 불가능하므로 적절한 보관을 위해 반드시 공간의 한 자리를 헌납해야 한다. 차지하는 크기도 만만치 않다. 경제적으로는 가볍게는 몇백만 원에서부터, 크게는 천만 단위를 들여야만 한다. 구매 이후 피아노의 이용 빈도나 유지 보수까지 고려해야 한다. 좋은 도구의 값이 비싸게 형성되는 것은 상식이지만 피아노를 소유하는 데에는 많은 결심과 능력이 필요하다.

 교육적 목적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고, 설치된 상태라면 언제든 이용할 수 있으나 그것을 가정에 소유물로써 들이기는 어렵다. 이러한 사실이 피아노를 이중적인 악기로 만든다. 음악 교육을 통해 피아노 음악을 연주하고 감상했던 경험은 악기의 높은 시장가와 대비되어 경험자의 내면에 피아노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내고, 친숙함과 더불어 악기의 고급성을 느끼게 된다.

 본 글에서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피아노가 고급 악기로서의 인식을 얻게 된 배경을 되짚어보며, 교육 및 사회적 측면에서 피아노가 가진 이중성의 출처를 간단하게 찾고자 한다.

 

 

2. 본론

 

. 피아노의 역사

 

 피아노는 피아노포르테(pianoforte)의 약자로, 건반 악기군의 대표로서 반주와 독주, 합주 등 다양한 음악에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대중성과 넓은 사용범위에 비해 피아노가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18세기로 상당한 최근이었다. 피아노가 등장하기 전에도 반주와 독주가 가능한 건반악기는 존재했었는데, 오르간을 제외하고도 전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악기로 쳄발로(Cembalo, )와 클라비코드(Clavichord, )가 있었다. 쳄발로는 현을 잡아 뜯어 소리를 내는 발현악기이며 클라비코드는 금속조각을 통해 현을 때려 소리를 내는 타현악기였다. 두 악기 모두 건반악기로서 당시 널리 보급되었으나 각각의 장단점이 존재했다. 먼저 쳄발로는 음향이 크고 선명해 연주회에서 주로 사용되었지만, 즉각적으로 강약과 같은 셈여림을 조절할 수 없는 것이 단점이었다. 반면 클라비코드는 당시 기술력하에 섬세한 음조절이 가능했으나 음량이 적은 탓에 주로 가정에서만 이용했다. 건반 기술자인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가 이를 개선하고자 하여, 쳄발로의 몸체에 용수철을 이용한 해머 회복 장치를 도입해 개발한 것을 피아노의 시초로 본다.

 개발 초기의 피아노는 환영받지 못했다. 18세기 독일의 시인이자 작곡가인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다니엘 슈바르츠는 갓 탄생한 피아노보다 클라비코드가 낫다.”1)며 기존 건반악기에 대한 선호 의사를 밝혔고, 당시 활발한 작곡 활동을 했던 모차르트도 클라비코드를 애용했다. 그러나 말년의 모차르트가 피아노를 이용해 작곡한 것을 시작으로, 융화되기 좋은 소리를 가지고 즉각적인 강약조절이 가능한 피아노가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반면 하프시코드와 클라비코드는 점차 쓰이지 않기 시작해 현재는 시대성을 재현하기 위한 역사적 유물로서만 남아 있다.

 피아노는 이후로도 연주자와 작곡가들의 요구를 반영해 꾸준하게 발전을 거듭했다. 현의 수를 추가하고, 건반의 수를 늘렸다. 1830년대에는 88개의 건반과 페달의 기능을 모두 갖춘 현대적인 피아노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 피아노에 대한 사회적 인식

 

1) 혁명 이전

 18세기 초 피아노의 개발 이후 많은 음악가가 피아노를 이용하고 연주했다. 그러나 악기 제조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였으므로 피아노를 접할 수 있는 것은 음악가와 상류계급 정도가 전부였다. 음악가는 궁정이나 귀족에게 고용되어 하인 신분으로 일했으며 작곡하는 음악도 상류계급의 취향을 따라갔다. 따라서 음악가가 아닌 이상 악기를 독점하는 것은 귀족과 왕족일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의 모든 피아노 음악이 상위계급에 의해 소비된 것은 아니었지만, 명실상부 피아노는 지배계급의 소유물이었고 대부분의 사람이 가져볼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귀중품이었다.

 

2) 혁명 이후

 1760년대부터 1820년대까지 넓은 시기에 걸쳐 행해진 산업혁명은 피아노의 생산을 용이하게 만들었으며,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시민이 음악 문화를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정 계층의 전유물 위치에서 벗어나 비교적 많은 시민이 연주하거나 소유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한때 지배계급의 손에 고립되어 고급스러운 악기로 존재했던 역사로 인해 피아노는 사회 상류층의 상징으로 등극한다. 귀족 궁정 내에 외부인을 응접하는 공간에 비치된 건반악기 피아노가 귀족 고급음악 문화의 상징으로 간주된 것을 기반으로,2) 피아노가 가진 고급의 가치가 시민에게까지 그대로 전달된 것이다. 혁명 이후 새로운 권력과 부를 잡게 된 중산층 시민들은 귀족의 삶을 흉내 내려 했다. 그리고 축적된 부를 과시하며 거금을 들여 피아노를 샀다.

 따라서 피아노는 당시 시민의 계급과 생활 수준 상승을 보여주는 확실한 지표가 되었다. 피아노를 구매할 정도의 경제력과 더불어 가정에서 피아노 연주를 즐길 여유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19세기의 가부장은 피아노를 구매하고, 가정의 여성들은 이상적인 가정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교양을 쌓기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누구나 가질 수 없었던 악기는 선택받은 부유한 시민의 손에 돌아갔다. 당시 피아노의 유행의 이유는 모든 음을 손가락으로 조율된 건반을 쳐서 만들어 내는 민주적악기로 칭할 정도로 다른 악기에 비해 일반인이 연주하기에 상대적으로 수월한 악기이기 때문3)이기도 했다. 거기에 가정의 유행으로 건반악기 음악이 성행하고, 악보를 구하기도 쉬워졌다. 가정적이고 고급스러우며, 한편으로 쉬운 악기라는 사회 보편적 인식은 19세기를 기점으로 생겨나 굳어지기 시작한다.

 

 

. 근대 한국 속 피아노 현진건의 <피아노>와 성장기 한국

 

 대한민국에 피아노라는 악기가 도입된 것은 언제일까? 국내 최초의 피아니스트인 김영환(1893~1978)에 의하면 국내 광무국 기사로 초빙된 프랑스인 마르텔 및 그의 피아니스트 배우자인 아멜리(Amalie)1905년에 도입해왔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보다 이른 1900326일에 사이드보텀의 아내 에피의 피아노가 부산을 거쳐 대구에 유입된 것4)을 구체적인 국내 피아노 도입으로 본다. 최초로 한국에 들어온 피아노는 교회음악과 연주를 위해 도입된 것이었으나 직후 일제강점기가 도래하며 피아노에 대한 서구적 사회의식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가정적인 고급 악기인 피아노는 서구화와 근대화가 동일하게 여겨지던 1920년대 후반의 한국에서 신여성이 갖추어야 하는 교양으로 급부상했고,5) 당시 모던걸의 현대적임과 부유를 나타냄과 동시에 우수한 가정에서 지녀야 할 소양처럼 여겨졌다. 문화생활은 곧 문명화였고, 우아하게 피아노를 연주하며 단란함을 유지하는 가족사회는 지식인들의 로망이었다.

 현진건이 192211월 발표한 단편 <피아노>는 서구 문화에 대한 근대 한국인들의 환상과 허위의식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상징적인 단편이다. 해당 소설에서 피아노는 어엿하고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꾸미기 위한 하나의 소품이자, 서구적이고 고급스러운 지배계급에 대한 동경의 표시처럼 등장한다.

 

(전략)
"그러지 말고 한번 쳐 보구려. 그렇게 부끄러워할 거야 무엇 있소."
이윽고 남편은 달래는 듯이 말을 하였다. 그러나 그 소리가 잡히지 않았다.
"나…… 칠 줄 몰라."
모기 같은 소리로 속살거린 아내의 두 뺨에는 불이 흐르며, 눈에는 눈물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것을 모른담."
남편은 득의양양한 웃음을 웃고는,
"내 한번 치지."
하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궐도 이 악기를 매만질 줄 몰랐다. 함부로 건반 위를 치훑고 내리훑을 따름이었다. 그제야 아내도 매우 안심된 듯이 해죽 웃으며 이런 말을 하였다.
"참, 잘 치시는구려.“

- 현진건 <피아노>

 

 

 <피아노> 속 주인공 궐은 형식상의 지긋지긋한 아내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뒤, 중등교육을 받은 젊고 어여쁜 처녀와 재혼한다. 궐과 아내는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을 이루기 위해 값비싼 가구로 집을 꾸미는데, 그러던 중 아내가 피아노를 들일 것을 제안한다. 두 명은 망설임 없이 훌륭한 피아노를 집에 들인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대로 피아노 구매를 제안한 아내는 연주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고 궐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부는 오로지 가정을 꾸미고, 사치품으로 사용하기 위해 피아노를 구매한 것이다.

 해당 단편과 같이 피아노를 지위 상승의 표현 도구로써 이용한 중산층 가정과는 다르게 실제로 피아노를 구비하고 연주할 수 있는 계층도 많았다. 부유한 계층의 자녀, 그중에서도 여성들은 이화학당을 다니거나 개인적인 교습을 받으며 서구음악에 대한 지식과 연주실력을 키워갔다. 이들은 피아노가 구비된 집에서 가정음악을 연주했고, 19세기의 유럽 시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상적인 가정과 음악교육에 힘썼다. 피아노는 당시에 구성하고자 하는 바람직한 가정에 대한 기준 속에서 가족 구성원 사이에 적절한 관계를 설정하고 어린이의 고상한 심성을 기르기 위한 도덕적 오락거리였다.6) 피아노에 대한 선망과 선호는 광복이 찾아온 이후에도 계속되었음은 물론이다.

 

개중에는 단결을 방해하는 언동도 없지 않어 어린 아이와 백발 로인이 수백리 같은 무한한 고총을 늣겨가며 것는 것도 본 척 만 척 소개짐인지 이사짐인지 알 수 없는 피아노 응접 셋트 등을 자동차에 싣고 달려가는 호화객이나.7)

 

 전란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도 피아노에 대한 열의는 식지 않았다. ‘정 트리오로 유명한 정명훈 일가에서 피아노를 싣고 피난을 갔던 일화8), 전쟁 중에도 피아노 위문 공연이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 당시 피아노가 사회에서 얼마나 높은 가치를 형성하고 선호 받았는지에 대해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피아노는 일제강점기 당시 서구적이고 과시적인 상류계급의 물건으로 전파되었고, 지배계급의 물건으로서 가지는 사치성은 산업 사회에 접어들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생산기술의 발달을 통해 국내산 피아노가 활발하게 수출되기 시작했지만, 여러 번의 경제 위기를 겪은 국민들에게 피아노의 소유와 교육을 통한 연주는 여전히 하늘의 별 따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삼익 악기, 영창 악기 등이 활발한 사업을 전개하며 피아노가 대량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악기를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 시기는 계층과 상관 없이 모두가 음악 교육에 매진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잠을 줄여가며 공장기숙사에서 피아노를 치는 여공의 이야기와 피아노를 배우는 딸을 바라보는 노동자 아버지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피아노는 중산층뿐만이 아닌 노동자 계급의 경제적 성취와 계급 상승의 바람을 드러내는 악기였다.9)

 

 

 

. 현대 한국 속 피아노 사교육 열풍

 

 피아노는 대량 보급된 이래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악기가 되었으나 이를 소유하는 것은 여전히 상류계급의 영역에 한정된다. IMF를 포함한 여러 번의 경제 위기를 겪으며, 악기와 음악 교육이 다시 여유 있는 지배계층의 전유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서론에서 언급했듯 피아노는 개인이 소유하기에는 경제적 부담이 큰 악기이다. 그러나 이를 소유할 수는 없더라도, 대중적으로 보급된 시절 학원이나 학교를 통해 피아노 및 연주를 접한 세대10)는 소유에 대한 열망을 갖는다. 기억 속에 남아 있던 피아노 교육의 추억과 기억, 혹은 경험은 곧 다음 세대에게 이어진다.

 교육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국민적 정서, 그리고 경제적 안정이 다시금 찾아오며 한국에는 사교육 열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태권도 학원, 발레 학원, 미술 학원 등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자본 아래에서 누릴 수 있는 다양한 경험들이었다. 피아노 학원은 교육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많았으며 설치형 악기가 가지는 이점으로 인해 사교육 열풍의 큰 축을 담당했다. 학원에 가기만 하면 질릴 때까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고 만질 수 있었던 시절, 현세대가 피아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추억은 당시 사교육 열풍에서 기인했다고도 볼 수 있다.

 

 

 

3. 결론

 

 사교육 열풍은 사그라들었다. 출산율 저하로 인해 학원생이 감소하고, 음악 교육에 대한 가치와 중요성도 전과 같지 않다. 피아노 학원은 눈에 띄게 줄어드는 추세다. 그렇지만 한때 피아노 학원에 다녀봤던 시민들은, 혹은 모종의 사정으로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던 시민들은 성인 혹은 늦은 나이가 되어서도 피아노 연주에 대한 꿈을 꾸곤 한다.

 피아노는 탄생한 이래 귀족과 부르주아를 비롯한 지배계급의 소유물이었다. 피아노의 소유가 일반 시민에게 허락되는 것은 오로지 사회의 전반적 부흥이 도래했을 때뿐이었다. 피아노를 대체할 수 있을만한 전자피아노나 키보드와 같은 악기가 등장했음에도 불구, 피아노 자체가 가지는 사치스러움은 긴 역사 속에서 굳어지고 말았다. 또한 일부 중산층 이상의 계층만이 누릴 수 있었던 전문 음악 교육의 존재 역시 피아노를 명품으로 만드는데에 일조했다.

 반면 경제적 부흥과 피아노 생산기술의 발달은 잠깐이나마 일반 대중에게까지 피아노를 누릴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시민들은 피아노를 소유하기 보다 대여했다. 짧은 기간이나마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음악 교육을 받고 개인의 예술적 시각을 넓혔다. 문제는 피아노를 경험으로써 소비할 수 있는 기간이 길지 않았다는 점이다. 명품이 가지는 과시적 특성과 더불어 교육에 대한 경험과 열망은 이후 세대에 사교육 열풍이라는 형태로 이어진다. 자라나는 시민들은 부모 세대의 영향을 받아 피아노를 체험하고 이에 대한 친숙함을 경험에 새긴다. 그리고 값비싼 피아노의 존재를 사치품으로 여기게 된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피아노는 경험과 경제적 우월감을 동시에 충족시켜주는 이중적인 악기가 된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만족감은 피아노의 유사품으로는 느낄 수 없다.

 정장을 입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연주가, 연주뿐 아니라 감상에도 고도의 전문기술이 필요한 피아노 음악, 그리고 상기한 특성으로 인해 경험 및 소유 욕구를 자극하는 악기 피아노에 대한 인식은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악기는 마치 경제적/잠재적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물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이러한 이중성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취미로 악기를 접하는 시민에게 있어 사치보다 경험이 우선되어야 한다. 음악의 실천을 통해 미적 감각과 성취감을 키우는 것, 그리하여 인간 개개인이 자신의 삶을 다양한 시각에서 받아들이고 청각적인 유희를 즐기는 것이 음악의 본질이다. 피아노를 통해 유익한 경험을 쌓았던 사람으로서, 피아노라는 악기가 단순한 명품보다 즐거운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도구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본 글을 작성하였다.

 

 


미주

1) 스튜어트 아이자코프, 피아노의 역사:피아노가 사랑한 음악, 피아노를 사랑한 음악가, 포노(2015), 39p, 재인용.

2) 조연숙.(2016). 19세기 독일시민가정에서 나타난 여성들의 피아노음악. 음악논단, 36(0): 25-62.

3) Stefana Sabin, Frauen am Klavier Skizze einer Kulturgeschichte (Frankfurt am Main: Insel, 1998), 12. 재인용.

4) 손태룡.(2013). 한국의 피아노 유입과정 고찰. 음악문헌학, 4(0): 9-85.

5) 박혜성. (2014). 한국 사회에서의 피아노의 문화적 의미. 한국예술연구, (9), 75-98.

6) 정지영. (2017). ‘가정음악’ 담론과 식민지 조선의 가정 형편. 페미니즘 연구, 17(2), 157-188.

7) 『조선일보』, 1950.12.28.

8) 정상영. '남다른 교육열…전쟁때도 피아노 싣고 피난'. <한겨레>. 2011.

9) 강명구, 「한국노동계급문화의 담론: 문화와 이데올로기의 문제 틀」, 『이론』, 1993.

10) 본 글에서는 해당 사례의 대표적인 세대를 7080세대 및 X세대로 간주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의 맥락을 고려하여 Y세대는 포함하지 않았다. 글쓴이 각주.

 

 

이외 개인적으로 공부한 자료와 함께 작성한 글입니다만, 고증 혹은 이론적 오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댓글을 통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적해주신 부분을 지식의 거름으로 삼고, 바르지 않은 부분은 고쳐 쓰겠습니다. 



양상추

<썬더 포스> 리뷰

2021. 4. 16.

 중년의 여성 두 명이 투 톱 체제로 서 있다. 이 한 문장만으로 영화의 코어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빌런이 일상에 깊게 침투한 사회, 과거 친한 사이였으나 가치관 차이로 소원해진 두 명의 여성은 치열하게 사회를 살아가는 30대가 되어 마주치게 된다. 이들이 다시 만나며 어떻게든 히어로가 되고, 어떻게든 적을 물리쳐 도시를 구한다. 히어로 영화라면 응당 지니고 있어야 할 구성이므로 <썬더 포스>의 내용을 열거하는 데에는 스포일러 딱지를 달 필요가 없어 보인다.

 단 이 영화만의 차별점이 있다면, '2021년에 나온 영화'라는 부분, 그리고 '두 명의 여성'이 주인공이자 히어로가 되어 나서는 작품이라는 지점이다. 원더우먼, 캣우먼, 블랙 위도우가 그렇게나 활약하지 않았나? 그게 왜 차별점이 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썬더 포스> 속의 히어로는 여성이자 다수로 연대하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부분에 있다. 전자는 숭고하고 강력한 영웅적 존재로서의 개인이라면, 후자는 군집이 되어 힘을 발휘하는 작은 사회인 셈이다.

 

 <썬더 포스>의 전개는 특별히 참신한 게 없다. 기승전결이 맞춰져 있고, 히어로는 강력하며, 악당의 술수에 잠시 고전하지만 이내 세계를 구해낸다. 뻔한 내용의 연속이라 시청자가 예측을 하면서 보면 전부 맞아떨어질 정도다. 하지만 이 영화는 내용 자체보다 내용을 다루는 과정에서 대사나 행위 등의 구성 요소에 더 신경을 쓴 것 같다. 전체적인 클리셰를 답습하지만, 그 클리셰를 구성하는 것들은 클리셰가 아니다. 영화의 등장인물은 모두 사회적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불완전함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불완전한 이들이 모여 완전함을 꿈꾼다. 말처럼 잘 돌아가진 않고 딱히 완벽해질 생각도 하지 않지만, 손이 닿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이 제법 친근하게 느껴진다. 중년 여성, 흑인, 미혼모, 동성애자, 후천적 변이를 갖게 된 인간들이 똘똘 뭉친다. 한 사람에게 주어져야 했던 능력은 두 사람의 친구에게 나누어 주어진다. 각자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힘을 합쳐 싸워갈 수밖에 없는 것이 <썬더 포스> 속 히어로가 살아남는 방식이다.

 물론 영화 속 소수의 특수성을 읽어내는 것은 영화를 감상하는 바깥의 인간들이다. 영화 내부에서는 이 모든 것이 특별한 일도 아닌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퀴어 프렌들리와 무관심의 배려가 공존한다. 참 이상적이고 좋은 세상 아닌가. PC 영화의 작위적임이나 B급 문화의 퇴색으로 비판받을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오히려 이러한 정치적 올바름이 영화 감상에 있어 무거운 생각을 하지 않도록 만들어주어 장점이 되기도 한다. <썬더 포스>의 살짝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운 감성이 가벼운 웃음을 주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웃음을 줄 수 없는 요소를 철저히 배각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배경은 일리노이 주의 시카고인데, 지역적 특성과 정치 풍자를 절묘하게 엮어내기도 했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접전처럼 보이는 정치 상황(우파와 좌파의 상징색도 완전히 같다), 백인 남성인 공화당 시장 후보와 흑인 여성인 민주당 시장 후보 등등의 소스가 상기한 소수의 연대성 및 온건 메시지와 엮이며 '민주당 영화'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실제 시카고의 시장인 로리 라이트풋은 흑인이자 동성애자이며 여성이다. 1년 전 미국을 휩쓴 대선까지 고려해보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런 점을 의식하고 만든 영화 같다. 의식하고 보면 글로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이념이 묻어 나오다 못해 뚝뚝 흐르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사족을 달 것도 없이 킬링타임 용으로 제격이다. 보통의 히어로 영화를 기대하고 보면 <썬더 포스>는 제목에 비해 조금 심심한 감이 없잖아 있다. 적당히 흐름상 넘어가는 부분도 많고, 대단한 임팩트가 있는 것도 아닌데 예산이 많이 들어간 영화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을 감안하고 감상하다 보면 크고 작게 웃음을 띌 수 있는 장면이 많다. 삼삼하지만 적당히 재미있다. 사이사이에 들어가는 소수자 해학도 과하지 않은 수준으로만 다뤘다. 인종도 성격도 직업도 다른 두 명의 중년 여성이 손을 잡고 영웅이 되는 이야기는 여전히 질리지 않는다. 앞으로 이런 이야기가 10년은 더 나와야 지겨워질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민주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재미를 느꼈다고 말하고 싶다. 국수주의자나 보수주의자에게 추천할 만한 영화는 아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썬더 포스> 대신 더 잘 만들어진 <슈퍼맨>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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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드볼/토마토

2021 04 11

2021. 4. 11.

 창작이란 자신의 경험과 가치관, 공상이나 이상 등을 하나로 녹여내 창조하는 행위다. 자신이 가진 언어와 표상을 통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창작자의 가치관과 정신은 직간접적으로 스며들어간다. 그리고 창작물의 소비자는 특정인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이를 내면화한다. 인지하고 소비했다면, 이후로는 감상을 통해 재생산을 시작한다. 소비자는 창작의 어떤 부분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며 이를 받아들인다. 최종적으로는 창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로 꺼내게 된다. 일련의 수용 과정에서 소비자는 특정인의 가치관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흡수하게 되는 셈이다. 창작에 대한 호불호를 표현하는 것은, 그것이 개인적인 감성일지라도 결국 창작물이 가지고 있는 특정인의 사상과 관념에 동조하거나 반대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물론 <국제시장>이나 <명량>을 감명 깊게 봤다고 말하는 사람을 섣부르게 보수적인 민족주의자로 몰고 가려는 의도는 없다. 단순히 그런 영화의 액션이나 음향, 표현 방식이 마음에 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영화나 만화가 강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고, 이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감상한 사람이라면 어떨까? 특히 그 메시지가 노골적일 정도라면 말이다. 한 번쯤 의심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급변하는 2021년에도 장애인, 여성, 노인과 아이, 퀴어, 이외 수많은 약자를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고 유린하는 창작은 꾸준히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것을 좋아한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오히려 늘어나는 추세로 보인다. 단순한 오락으로 삼으며 가치관에 동조하지 않는다면 참 좋겠지만, 기저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읽어내고자 하는 사회에서 특정 창작에 대해 좋다고 말하는 행위는 강력한 관념의 표현이자 권력 행사가 될 수 있다. 어떤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어떤 음악이 싫다고 말하는 것, 혹은 그 드라마의 어떤 인물에 공감했다는 단순한 감상도 여럿이 뭉쳐지면 가치관을 뒤집어쓰며 강력해진다. 그 가치관이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라면 더더욱이다. 그러니 폭력적인 영화를 사랑하고 차별적인 만화를 소비하며 자신도 모르게 드라마 속 도덕적 악인의 손을 들어주는 이들은 간접적인 비평의 권력자가 된다.

 새삼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얼마 전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취향과 가치관을 동조하며 이를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어떤 사람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평등하다고 믿고 있었지만 그의 호는 극도로 마초적이고 폭력적인 창작물에 국한되어 있었다. 반면 장애인의 권익 보호나 성평등적 메시지를 담은 모든 창작물은 불호했다. 이를 직접 말하는 과정에서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호불호를 강력하게 피력할 수 있다는 것은 막강한 힘이다. 그 창작물 속 가치관이 사회로부터 거부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바닥 아래를 받쳐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면 아주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조심스럽게 화두에 등장한 성평등 및 퀴어 프렌들리 창작물 이야기에 대해서는 기이한 분위기가 이어졌는데,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야기는 빨리 묻어버리고 싶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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