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하면 이 작품을 본 적 있다는 사실을…평생 기억 한 구석에 묻은 채로 살고 싶었습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꿈도 희망도 없는 잔혹한 이야기'의 대표주자로 이 애니메이션을 회자한다는 것에 충격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나도 분명 그렇게 생각해서 이 애니메이션을 봤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후회하고 있다…. 리뷰를 쓰기에는 상당히 오래 되었으나(2017년 국내 수입 당시 바로 봤다) 리뷰를 작성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정도로 기억이 남아 있다고 판단해서 몇자 적기나 해보려고 한다. 과연 이 글은 리뷰가 될 것인가? 혹은 나의 과오에 대한 고해의 장이 될 것인가?!
<메이드 인 어비스>는 데포르메가 많이 된, 혹은 팬시하고 동그란 모에 계열 그림체와 비견하여 잔혹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 뿐 아니라 일본에서는 무해함을 연상시키는 비주얼에 비해 잔혹한 전개를 가진 '반전성 작품'이 많은 축에 속한다. 그저 귀여운 외형으로만 보이던 인물이 180도로 돌변하는 수준이 아니다. 작품의 플롯이나 전체적인 전개에 있어 작화를 큰 분위기 반전의 무기로 삼는 것이다. 여기에 단순히 충격과 서스펜스만 존재한다면 다행이겠다. 논란의 중심이 되는 것은 그림을 통해 이야기의 연막을 치는 작품의 상당수가 잔혹함, 선정성과 같이 자극적인 소스를 사용한다는 지점이다. 애니메이션, 만화와 같이 시각 정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작품에서 그림체를 이용한 이야기의 반전을 꾀하는 것은 효과적인 장치이며 이를 통해 작품이 더욱 매력적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상기한 점을 우선 언급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메이드 인 어비스>에 이러한 장치가 진하게 녹아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구멍 '어비스'가 생겨남에 따라 다양한 생물과 유물을 만나기 위해 목숨을 건 탐험을 한다는 전개. 주인공인 리코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어비스로의 탐험을 강행한다. 이 미지의 세계는 장성한 성인조차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생명에 위협적인 것들이 도처에 가득하다. 괴생명체나 유물과 같은 요소는 주 무대에 얽힌 이야기를 궁금하게 한다. 그러나 매력적인 배경 설정, 그에 따른 인물의 개성과 별개로 이 작품은 '위험한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반전성'을 극단적으로 남용하고 만다. 15금이라는 수위 제한이 무색하게도 주인공 일행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 너무도 잔인한 일을 겪는다. 잔혹함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로 개연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나 집착적일 정도로 사고에 공을 들이는 묘사는 불편함과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굳이 정성 들여 보지 않더라도 세계가 위험한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후퇴 뒤의 전진을 위해 신체·정신적 피해를 보는 것은 극단적 세계에서 불가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불필요한 고통 묘사에 정당함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좋게 보면 실감 나는 연출이지만 나쁘게 보면 그저 폭력 포르노다. 과장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정말 그러지 않아도 되는 장면에서까지 가학적으로 고통을 묘사한다…. 작가는 정말 필요한 연출이었는지, 정말 필요한 전개였는지를 특별히 고려하지 않은 듯 하다. 꼭 이랬어야 했나? 이 고통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림체를 통해 연출의 연막을 치는 방법은 굳이 이 작품이 아니더라도 많은 곳에서 쓰고 있는 방식이다. <마법소녀 육성계획>과 같이 겉으로는 힐링을, 속으로는 킬링을 갖춘 작품이 한둘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이 작품은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의 도식에서 잔혹성을 극대화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음) 누차 말하지만 이러한 부분 자체가 문제가 된다고 하고 싶지는 않다. 창작에는 다양한 연출 방식이 있고, 이 방식이 2020년 현재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사실이다. <메이드 인 어비스>는 확실히 잘 짜여진 세계와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 재미를 느낄 부분이 많다. 그러나 그림체와 연출 사이 괴리가 너무 심하다는 점이 부정적인 면의 큰 축을 담당한다. 일종의 '모에 슬래셔' 장르 감상을 반복하다 보면 작품의 창작자도, 향유자도 이 자극적인 요소에 대한 자각 능력이 떨어지고 만다. 특히 본 작품처럼 직접적으로 아동을 연상시키는 그림을 통해 선정적인 장면을 자주 접함으로써, 보고 듣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레 '아동을 연상시키는 그림이어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무의식이 자라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전 안 그랬는데요"라고 하겠지만…잘 만든 창작물이 사람의 판단 기준에 끼치는 영향력은 상당합니다.
<메이드 인 어비스>의 어비스는 깊은 마경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작가의 심연 속, 되도록 은밀히 숨겨야 할 가학적 욕구이기도 하다. 모든 작품이 필요한 만큼의 요소를 조절해 쓰지는 않겠으나 그것이 심해지는 순간 작가가 바라는(혹은 선호하는) 단면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정말로 불필요한 소아성애적 연출이다. 솔직히 이 부분은 너무 유명해서(ㅋㅋ;;) 언급하고 싶지도 않아 생략함….
자극은 이제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드는 수단의 자리를 벗어나 기어코 목적이 되고 말았다. 어째서 누군가가 잔인하게 죽고 다치는 것, 불행과 괴로움을 겪는 모습을 포기하지 못하는가? 극단적인 창작자의 계단이 있다면 <메이드 인 어비스>는 그 계단 중 아주 튼튼한 부분을 차지했으리라. 가학성에 기호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애니메이션을 참 재미있게 보겠지만…그렇지 않다면 불필요한 심연 속으로 자기자신을 밀어 넣는 행위밖에 더 되지 않을 것이다.
결론: 꼭 보셔야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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